나의 첫 번째 시집살이

감사했습니다 이모, 이모부!

by 추억바라기
이모, 시원하세요?


나의 두 번째 하숙 생활은 군에서 제대 후에 시작됐다. 학교로 돌아가기 한 달 전 알아본 하숙집은 학교 앞 가정식 하숙집이었다.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서울에 이모가 살고 계셔서 어머니는 이모에게 나를 맡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난 군대까지 다녀온 상황에 더 이상 이모집에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설득했고, 그때까지 아버지 사업 상황이 완전히 기울지는 않은 상태여서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았다.


처음엔 마냥 좋을 것 같았던 내 하숙 생활은 생각처럼 나만의 공간을 영위하거나, 편안함을 추구하기가 어려웠다. 하숙집 주인 분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남의 집에 집주인과 불편한 동거를 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일찍 하숙집을 구한 다른 하숙생들은 주인어른분들과는 층이라도 달랐지만 난 같은 거실 공간을 쓰는 같은 층에 방이 있어서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응답하라 1994'에 하숙집 같은 구조로 되어서 다른 하숙생들은 드라마에서처럼 2층에 방이 있었지만 난 하숙집 어른들과 1층에 방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주인어른분들은 사람 좋게 생기셔서 항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늦게 들어갈 때도, 너무 일찍 들어갈 때도 난 항상 불편했다. 하숙집에 가면 나의 행동반경은 딱 세 평 남짓 내 하숙방으로 한정되었고, 화장실과 식사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니 그냥 말 그대로 감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갑갑하고, 불편했던 내 하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6개월 만에 남의 집살이는 상황 종료되었다. IMF으로 인한 피해가 우리 집이라고 피해 가지 못했고, 어려워진 가계 상태로 비싼 하숙비와 학비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컸었다. 결국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내게 서울에 계신 이모집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고, 답답했던 하숙 생활에 지쳤던 나도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예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방학이면 종종 놀러 갔었던 이모집은 다세대 방 두 칸의 작은 전셋집이었고, 군 휴가 때 나와서 갔었던 이모집은 방 세 개로 조금 더 넓어진 빌라였다. 하지만 내가 이모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기 얼마 전 이모부의 사업 성공으로 이모집은 조금 큰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마침 큰 사촌 형은 결혼하여 분가해 나갔고, 작은 사촌 형과 나와 함께 방을 썼던 또 한 명의 외사촌 형까지 셋이서 이층을 사용하는 호사를 누렸다. 처음에는 나이 차도 많이 나지 않고, 좋아하는 취미나 스포츠 경기도 같아서 진작에 들어올 걸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그리 길지 않았고, 보수적이셨던 이모부의 잔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괴롭혔다.


'저녁 먹기 전에는 집에 들어와라'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일어나면 이불부터 잘 개고, 방은 깨끗이 청소하고 다녀라'

'TV 그만보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밖에서 술 먹고 다니지 마라'


24년 동안 부모님이 하지 않던 잔소리를 한 달도 안되어서 매일을 듣고 지냈다. 거기에다가 이모 집에서는 막내이다 보니 온갖 심부름은 모두 내 몫이었다. 집에 일찍 들어간 날이면 집안일에, 이모 팔다리를 한 시간 가까이 주물러 드리는 통에 내 손과 팔은 저리고, 근육 뭉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그렇게 꼼짝없이 이모부 눈치를 살피며 하숙집과 별반 차이 없는 불편한 동거를 이어 나갔다. 불편한 마음이 더 불편해 진건 당신들의 아들인 사촌 형과 차별 대우한다는 느낌이 날 종종 아프게 했고, 아마도 당시 성숙하지 못했던 내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었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게 이모집에 있었지만 당신들에게 하는 내 말과, 행동은 모든 것들이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조금이라도 이모집에 편히 있기 위해 조금은 위선 섞인 말과 표현으로 그 순간순간을 모면하며 보냈었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대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서야 난 비로소 이모집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나마 이모 친구분이 하시는 월세방이라 간신히 이모부의 허락을 받아 나오게 됐다. 사실 작은 사촌 형이 장가를 가고 나서는 이모집 자식들이 모두 분가한 상태에서 조카를 두 분이 데리고 있는 것도 서로 불편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도 조금 더 서둘러 나왔다. 하지만 내가 이모집을 나올 때까지 이모부의 잔소리는 계속됐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모부 잔소리도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듯했다. 잠깐이지만 그땐 이모부 잔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니 조금 서운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난 짧지만, 조금은 불편했던 내 시집살이에서 독립했다. 주말에는 이모집에 하루는 들러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불완전한 독립이었지만 일주일에 6일이라는 근사한 자유를 얻었다. 그렇게 혼자 나와 생활하니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 좋았고, 밥을 안 먹어도 야단치지 않으니 좋았고, 밤늦게 귀가한다고 잔소리를 듣지 않으니 좋았다. 그래도 주말 아침이면 이모집에 들러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일주일 중 하루는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처음 일주일에 한 번씩 가던 걸음도, 시간이 갈수록 이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점점 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주말 이모집에 갔을 때 2년을 지내면서 보지 못했던 불편함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걸 깨닫게 됐다. 그날은 한 달만에 이모 집에 들렀고, 때마침 둘째 형과 형수도 집에 와 있어서 오랜만에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자리에서 오랜만에 이모부의 폭풍 잔소리가 쏟아졌고, 그 잔소리의 타깃은 내가 아닌 작은 형이었다. 들어보니 예전에 내게 쏟아부었던 사소한 잔소리들이었고, 그 잔소리들 속에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 이모부가 내게 했던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였다. 당신께서 부모 대신 조카를 맡아서 잘 데리고 있어야 할 의무감과 조카를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난 따뜻한 잔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2년을 조금 원망했고, 불편해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이모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해봤다. 사실 예전 같으면 주물러 드리고 싶은 마음보다 의무감에 손을 움직였지만 오늘은 2년을 날 자식처럼 돌봐준 고마움으로 기분 좋게 주무르고 있었다. 이모는 조용히 내게 이모부 얘기를 건네셨고,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 마음을 보듬어 주셨다.


"철수야, 이모 집에 있는 동안 많이 불편했나?"

"어? 아니, 불편하기는. 나야 이모 덕분에 잘 지냈죠."

"이모부가 너무 잔소리가 심해서 많이 힘들었지. 근데 이모부가 너 나가고 나서 정식(둘째 형)이 나갔을 때보다 더 적적해한다. 힘들더라도 오늘처럼 주말에 가끔 와서 밥 먹고 가라."


등 돌려 엎드린 이모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상상하는 그런 따뜻한 표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다시 꺼내면 울먹일 듯해서 난 한 동안 아무 말없이 이모 다리만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모 다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늘어졌을까 하는 마음이 들자 오랜만에 이모집에 온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모, 시원하세요?'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다녔던 이모집을 결혼하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며 가끔씩 들여다보던 발길도 끊겼고, 이모부의 사업실패와 함께 그렇게 점점 소식을 주고받는 횟수까지 줄어들었다. 난 나대로 바삐 사느라, 이모는 이모대로 잊으려고 하셨던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하니 가끔 보는 얼굴은 서먹해져 갔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 아버지 사업 자금으로 도움을 줬던 일들 때문에 서로 불편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이모집을 찾을 일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꽤 오랜 시간만에 이모를 보게 됐다. 지방 병원에서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검사,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알아본 병원이 서울 OO병원이셨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면 예약하고, 진료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급한 마음에 아버지는 이모에게 연락을 했고, 이모의 지인 소개로 당일 서울 OO병원 검사와 진료 예약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돈 문제로 감정을 밀어냈던 이모가 어머니의 병환 소식에 한 달음에 병원까지 오셨다. 난 오랜만에 보는 이모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함께 들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렇게 이모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다.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내게 당부하시며 내 손을 잡았던 그 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연락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잠시 난 또 5년을 보냈다. 그러고 5년 만에 만난 곳이 어머니 장례식 날... 감사한 마음은 늘 갖고 있지만 이제는 불편함을 무시하기엔 너무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이십여 년 전 서울에서의 내 대학 생활은 너무도 따뜻했고, 감사했다. 두 분이 계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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