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난 학교 운동회를 많이 좋아하진 않았다. 또래 친구들보다 작았던 신체 사이즈에 운동 또한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골목 친구들과는 많이 어울려 놀았어도 학교의 같은 반 친구들과는 어울려 놀지 않았다. 어릴 적 운동회를 떠올리면 즐거웠던 추억은 학교 건물 뒤편 그늘에서 부모님과 함께 돗자리를 깔고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오신 도시락을 먹었던 일이다. 또 평소 보지 못했던 각종 노점상들이 총출동해 구경거리가 많았고, 평소 같으면 지갑을 잘 열지 않던 아버지도 이날만큼은 오백 원짜리, 천 원짜리 지폐를 내 손에 턱 하니 쥐어주는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날이었다.
하지만 내겐 이런 즐거움을 빼고는 운동회가 즐겁지 않았다. 함께하는 곤봉 마스게임, 줄다리기, 이어달리기 등 좀처럼 흥미를 갖고 참여한 경기가 없었고, 그나마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트렸던 경기가 겨우 흥미를 끌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달리기를 특히나 싫어해서 나머지 경기들도 패키지로 한 방에 묶여 마음으로 밀쳐낸 듯하다. 내가 학교 운동회를 싫어했던 이유는 아마 1학년 첫 운동회 때 달리기 경기에서 꼴찌를 하면서부터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50명을 훌쩍 넘을 정도로 정원이 많았다. 그래서 달리기도 5~6명씩 한 조를 이루어 경기를 해야 했었다. 학교에 가기 전까지 동네에서 제법 뜀박질을 하고 다녔던 나여서 그때까지는 큰 긴장이 없었다.
반에서 키 순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작았던 나여서 제일 먼저 달리기 시합 트랙에 나섰다. 출발 선상에 서서 양팔을 가슴에 붙이고 팔에 잔뜩 힘준 채 뛸 준비에 돌입했고,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몸은 어느새 길어진 대기 시간으로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앞을 노려보고 잠깐을 있는 사이 출발선에 서계신 선생님의 팔이 올라갔고, 올라간 팔 끝에서 '빵'하는 큰 소리가 울렸다. 난생처음 듣는 총소리에 난 긴장한 몸이 튀어나가기도 전에 그 '빵' 소리에 놀라 주춤거렸고, 놀란 몸으로 출발은 늦었지만 어떻게든 3등 안에 들기 위해 두 발을 열심히 땅에서 띄며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먼저 뛰기 시작한 아이들을 따라 잡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고, 이렇게 열심히 뛴 결과가 보기 좋게 6등이었다. 정말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이날 이후 난 운동회 때 달리기 트랙에 올라 선생님이 들어 올린 팔만 보면 몸이 경직되었고, 마치 선생님의 신호 총이 나를 겨누는 것처럼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렴풋이 나는 기억으로는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달리기 경기 후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한 번 자신감이 떨어지고 나니 운동회 때마다 번번이 달리기 경기에서는 작은 사고들이 겹쳤다. 넘어져서 하얀 스타킹의 무릎에 구멍이 나기도 하고, 함께 뛰던 아이의 앞발에 차여 중간에 포기도 했었다. 이렇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니 운동회는 다른 아이들의 축제가 되었고, 운동회 날이 다가오면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3년이 지나고, 4학년 가을 운동회에서 난 처음으로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다. 부끄럽게도 함께 뛰어야 하는 반 친구 다리가 아픈 바람에 4명이서 트랙에 섰고, 그래도 난 꼴찌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더니 뒤에서 2등, 앞에서는 3등으로 3등까지 찍어주는 그 도장을 받았다. 그게 뭐라고 그리도 뭉클했던지.
난 도장을 받아 기쁜 나머지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부모님께 거짓을 말했다. 5명 중에 3등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아마 내가 뛰는 모습을 보셨을 텐데 그때엔 시침 뚝 떼고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주셨다. 그 날 이후 난 더 이상 운동회가 싫지도 않았고, 신호 총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물론 달리기 경기를 하기 위해 트랙 위에 서면 떨리고, 긴장은 됐지만 예전처럼 얼어붙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생겼던 그 일은 내겐 작은 트라우마가 됐던 사건이었고,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것 또한 나 스스로가 했던 일이었다.
딸아이를 키우며 딸아이 스스로가 만드는 트라우마를 여러 번 함께 경험했다. 아마 딸아이의 첫 트라우마가 된 사건은 유치원 시절 장기 자랑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년에 한 번 유치원 학부모들을 모셔놓고 아이들이 준비한 장기를 무대에서 예쁘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딸아이도 열심히 무대를 준비했고, 혼자 무대에 올라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 실수로 딸아이는 후렴구 들어갈 부분을 놓쳤고, 어렵게 무대는 마쳤으나 그 날 이후 6년이 넘게 딸아이는 더 이상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목소리도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데 난 딸아이의 노래하는 모습을 가족들 생일 축하 노래를 제외하고는 들어보는 게 하늘에 별 따는 것만큼 어려워졌다.
이렇게 스스로 가둬놓은 트라우마는 나에게도, 딸아이에게도 있었다. 이런 트라우마는 만든 것도 자신이지만, 이겨내야 하는 것 또한 자신임을 난 딸에게 이야기한다. 언젠가는 자신이 만든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아빠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노래할 딸아이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초등학교 운동장 트랙 위에서 열심히 뛰었던 그 날의 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