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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an 08. 2021

다섯 시간이 넘었던 고상한 중노동

작가님에서 이젠 멘토님?

 "ASMR~ 안녕하세요 저는 IT 관련 직군에 종사 중인 21년 차 엔지니어 '라떼' 멘토예요"


회사에 오후 반 연차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강남으로 나섰다. 오후 시간대 지하철 2호선 객차 안은 빈자리는 없지만 한산했다. 예전엔 그리도 많이 탔던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어젯밤 내렸던 눈과 한파로 바깥은 여기저기가 노년의 백발이다.


작년 11월 '브런치 작가에게 제안하기'를 통해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연락을 한 사람은 지식 공유 플랫폼 사이트 MD였고, 제안 내용은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멘토 제안이었다. 브런치에 쓰는 내 글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글쓰기였지만 내가 쓴 매거진 일부(시간이 머문 자리 직장 편)를 보고 연락이 온터라 멘토 수락 여부와 상관없이 반가웠다. 그리고 MD가 제안한 멘토는 누구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가 궁금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담당 MD와 난 메일을 주고받았고, 결국은 멘토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담당 MD의 요청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10일의 원고 마감일에 맞춰 1차에 20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작성했다. 1차 검수가 완료되고, 이어서 계약 요청이 와 전자서명까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계약 후 다시 2차 원고 요청이 왔고, 다시 2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원고를 일주일 만에 작성해서 넘겼다. 담당 MD의 최종 검수  및 편집이 진행되었고, 이번 주 월요일에 받은 최종 원고는 42페이지의 꽤 두꺼운 분량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원고를 오늘 녹음하는 날이었다. 평균 스무 페이지 분량 원고 녹음에 걸리는 시간이 2시간이라는 얘길 전해 들었다. 난 녹음 일정을 미리 확인해서 목요일에 오후 반차 휴가를 냈다. 4시간을 예상하고 찾아간 녹음실은 역삼역 근처에 있었지만 큰길이 아닌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어서 얼어붙은 길을 찾아 가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사무실 건물 앞에 도착해 담당 MD에게 전화를 했고, 직원 한 분이 나와 스튜디오 같은 사무실 안으로 날 데리고 이동했다.


직원에게 이끌려 간 곳은 작은 녹음실이 있는 방이었고, 녹음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식음료와 오늘 읽어야 할 내가 쓴 원고가 고운 자태를 뽐내며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분은 녹음 시 주의 사항 및 화장실 등의 위치를 알려주고 자릴 떠났다. EBS 라디오 제작국에서 녹음해 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조금은 그럴싸한 녹음실을 기대했지만 덩그러니 혼자 남아 녹음을 하라고 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긴 긴 시간 녹음 후 편집을 한다고 하니 오히려 이런 시스템이 오늘 같은 녹음에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녹음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긴 숨을 한 번 토해냈다. 짧지만 내 다짐이었고, 시작의 의미였다. 난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인 원고를 집어 들고 녹음을 시작했다.


 "ASMR~ 안녕하세요 저는 IT 관련 직군에 종사 중인 21년 차 엔지니어 '라떼' 멘토예요"


추위 속에 걸어와서 입이 덜 풀렸는지 첫 페이지를 읽어나가는데 열 번이 넘게 버벅거렸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를 넘길수록 더듬는 횟수는 줄었고, 읽는 속도도 조금씩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가 쓴 원고의 양은 많았다. 그렇게 한 참을 읽은 듯했는데도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가 더 많았고, 목소리도 잠기고, 난방이 되지 않는 녹음실 안이 썰렁해 손까지 시렸다.


잠겨오는 목을 따뜻한 물로 축이고, 시려오는 손은 겨드랑이 사이에 꽂고 잠시 쉬었다 다시 녹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허기까지 몰려왔다. 입으로 계속 떠들어서 그런가 테이블 위의 주정 부리로는 좀처럼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배에서는 계속 격렬하게 소리가 울렸다.


 ' 꾸루~룩, 꼬오~로로 록~. 이 마이크 ASMR 녹음할 때 쓰는 마이크라고 했는데 배에서 나는 소리도 녹음되는 거 아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난 어쩔 수 없이 배에서 나오는 소리에 신경을 썼고, 배에서 소리가 날 때면 읽기를 멈춰야 했다. 가끔 읽는 중에 '꼬르륵' 소리가 함께 나와버려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기까지 했다. 그렇게 긴긴 시간  녹음 진행을 했고, 생수 500ml 세 병을 모두 비웠다. 녹음 시간이 자그마치 5시간 30분. 2시 30분에 녹음실에 들어와 지금 시간이 8시. 살면서 쉬운 일이 없지만 난 오늘 '5시간의 고상한 중노동'을 했다. 새삼 방송하는 분들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멘토님,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편집 잘해서 사이트에 올릴 때 담당 MD가 연락드릴 거예요."

 "네, 생각보다 많이 힘드네요. 혹시 편집 완료되면 저도 들어볼 수 있나요?"

 "파일 유출 때문에 음성 파일은 제공드리지 않고요. 사이트에 업로드하면 연락드릴 거예요"

 "네, 혹시 저도 구매해야 하는 건 아니죠?"


오늘의 재미나고, 행복한 중노동도 알고 보면 브런치 덕분이다 싶다. 브런치를 하며 많은 일들이 있어왔다. 오늘 취준생들을 위한 멘토로서 오디오북 녹음도 아마 행복한 중노동 정도로 기억될 듯하다. 사이트에 업로드되고 나면 계약에 따라 판매 수익의 일부는 책을 팔면 들어오는 인세처럼 월 단위로 정산이 된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잠깐 동안 그 판매 수익이 내 통장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게 해 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꼭 배부르게 채우지는 않더라도 내 목소리를 듣고 조금이라도 도움될 친구들이 있으니 그걸로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의 중노동엔 의미가 있다.


2021년 시작이 조~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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