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려 온 전화를 피하고 싶었다

1월의 추위에도 활짝 핀 사랑초가 우리와 닮았다

by 추억바라기
세상에는 이겨내기 힘든 시련은 있을지언정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내와 난 결혼 20년 차 부부다. 그것도 아주 사이좋은 부부다. 연애 때 같은 설렘은 없지만 늘 함께하면 기분 좋은 사이다. 물론 사람의 감정은 쌍방의 크기가 같을 때 더 빛나고, 아름답겠지만 결혼하고 20년쯤 된 부부라면 어느 한쪽의 감정이 더 큰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가 아끼고, 사랑한다는 마음이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우리는 연애시절까지 합치면 자그마치 26년을 서로만을 봐왔다. 이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늘 상대방을 생각하며 지냈다고 해도 26년이라는 시간이 순탄하고,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도 넘기 어려웠던 시련들이 있었고, 그 시련이라는 넘기 힘들었던 산을 잘 극복하고, 이겨내서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우리의 시련은 연애 때부터였고, 결혼 얘기를 꺼내기 전부터 내 어머니의 반대로 아내와 난 무척이나 눈치 보이는 연애시절을 보냈다. 직설적인 표현으로 반대하시지는 않았지만 '툭툭' 던지시는 말속에 아내에게는 가시 돋친 말로써 상처를, 내게는 어머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도록 불편함을 주셨다. 그런 어머니 말을 들을 때면 가끔은 열 마디 욕보다 더 아프게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내와 난 꿋꿋하게 우리 사랑을 지켰고, 아버지 사업실패에 아버지의 사업장도, 우리 집도 그동안 누렸던 모든 것을 잃고 나서도 아내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내는 내 곁을 지켰고, 방황할 뻔했던 내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아마 그 당시 어머니의 마음은 그런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은 당연했었고, 진심으로 아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하지만 결혼 전 우리의 시련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결혼 후 신혼의 달콤한 단꿈을 꾸며, 앞으로를 계획하며 지내도 부족했던 시간에 아버지의 사업실패 후폭풍은 아주 매서웠다. 결혼 후 과거 아버지 사업장 지역 의료보험 체납으로 급여까지 차압이 들어오기도 했었고, 급여일마다 어머니의 돈 부탁과 채무 관계에 있던 친척들까지 돈 문제로 우리를 한 동안 괴롭혔었다.


한 동안 돈 요청은 계속됐고, 시간이 한 참 지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시점에도 난 늘 불안한 마음으로 급여일을 맞는 날이 많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와 고향을 떠나 새롭게 시작한 일이 익숙해지지 않았을 아내에게 너무도 가혹한 시간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내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분담하게 하는 내 부모님이, 내 현실이 너무도 싫었다. 하루하루의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아 아내에겐 결혼 서약의 짐이 너무도 가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때는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반갑지 않았고, 오히려 솔직한 마음으로는 부담이었고, 피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이럴 때마다 아내는 매번 날 위로했고, 자신은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더 안심시키고는 했었다. 아내에게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하지만 이런 시련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빈도 수가 줄었고, 가끔 힘든 일들이 닥쳐왔지만 지켜야 할 가족이 더 생기고, 흔들리지 않는 아내와 나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시련들을 마주하며 이겨내 왔다.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힘든 문제도 아내와 함께 의지하며 이겨내려고 노력하니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지나갔고, 부러지지 않을 만큼의 내공도 쌓였다. 풀릴 것 같지 않은 실타래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넘어져도 툭툭 털며 일어날 여유도 생겼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강해졌고, 스스로 떨쳐낼 힘도 이젠 넘쳐난다.

봄도 아닌데 예쁜 사랑초가 꽃을 보였다.


짧은 겨울 일조량에도 생명의 고귀함과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게 너무도 따뜻하고, 뭉클했다. 얼마 전까지 혹독한 추위에 베란다의 온도도 밤에는 1~2도를 오락가락할 만큼 매서웠다. 한기 가득한 아내의 베란다 정원에도 해가 드는 낮 시간만큼은 적당히 따뜻한 온도를 유지했다. 매서운 추위에서도 잘 견뎌낸 아내의 식물들은 지난주부터 부쩍 풀린 날씨 덕에 1월 한 겨울에 활짝 꽃을 보였다. 마치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며, 시련을 툭툭 털며 지내온 지금의 우리 가족같이.


얼어붙은 땅도 늦겨울 한 낮 햇살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우리가 겪는 시련들도 참고, 견디면 그 어려운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 시간은 혹독한 겨울 추위만큼이나 차갑고, 매섭지만 견뎌내고, 버텨내면 따뜻한 봄은 언젠가는 우리 곁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아내의 베란다에 핀 사랑초처럼 이 겨울을 당당히 이겨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에 분주할 날이 곧 올 것이다.


굳이 따져 물으면 무신론자다. 하지만 만일 신이 있다고 한다면 신은 우리 모두에게 시련을 주지만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시련을 맞닥뜨렸을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힘을 쏟아 이겨내면 앞으로는 쉽게 포기라는 이름으로 시련에게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올 겨울에도 이런 시간 속에 혹독한 추위는 지나가고, 머지않아 따뜻한 봄이 오고 있음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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