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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r 15. 2021

우리의 백 한 번째 데이트

300번쯤 됐을 것 같은데, 봄이 오긴 했나 봐요

 "딸~, 내일 아빠랑 상어 보러 안 갈래?"


3월 초 차가웠던 바람도 어느새 따뜻한 동남풍으로 바뀌고 봄기운이 완연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 휴가를 냈어요. 휴가가 금요일이어서 주말 포함해서 긴 주말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이들 둘 모두 학교를 가는 주간이라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아내와 재작년에 찾았던 서삼릉 누리길 데이트를 했어요.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목적으로 걷기도 하고, 아내와 한적한 봄길 걸으며 행복한 시간도 함께 할 겸 일부러 시간을 냈어요.


예약해 놓은 병원 진료를 마치고 아내와 전 병원 앞에서 원흥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어요. 원흥역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요즘 수험생인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지친 아내는 부족한 쪽잠을 청했고, 우린 조금은 흐린 날씨였지만 봄기운 완연한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보며 원흥역까지 이동했어요.


원흥역에 내려서는 미세먼지는 많은 날이었지만 따뜻한 날씨에 계획했던 목적지인 서삼릉까지 약 2.4Km를 걸었어요. 재작년 봄에 아내와 함께 찾았던 길이라 조금 익숙했지만 헤매지 않으려고 지도 앱을 켜고 지금 위치와 가야 할 길들을 들여다봤어요. 우두커니 잠시 스마트폰을 보던 내게 아내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어요.


 "아니, 지도 앱을 보면서도 그렇게 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게요. 내가 운전을 못해서 그러는지 지도 같은 게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나 운전해도 네비 못 봐서 운전이 많이 어려울 거 같아요"

 "내가 이 동네는 많이 와봤잖아요. 지도 앱 보지 말고 그럼 날 따라와요"


이번에는 내가 '피식' 아내를 보며 웃었어요. 아내가 과거 운전을 좀 하긴 했지만 저보다는 많이 길눈이 어두운 편이거든요. 그래도 재작년에 아내는 근처 농협대를 몇 달을 다녀서 그런지 자신 있게 앞으로 치고 나가길래 조용히 아내 뒤를 따랐죠. 다행히 아내의 기억은 정확했고, 우린 나란히 옆으로 서기도 했다가 길이 좁아지면 앞뒤로 열을 맞추기도 하면서 예전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길을 걸었어요. 마치 우리가 부부로 걸어왔던 20년 인생처럼 말이죠. 그렇게 30분을 걸었더니 어느새 우린 서삼릉 입구까지 도착했어요.

 

고양 서삼릉은 '서쪽에 있는 세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희릉, 효릉, 예릉이 있는 곳이다. 처음 헌릉 근처에 있던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이 1537년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 황후의 예릉이 조성되었다.  
 
- 서삼릉 입구 해설서 중에서 -

이렇게 서삼릉을 둘러보고 나와서 아내와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어요. 서삼릉 근방에는 식당이나 카페가 없어서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애초에 이곳을 올 때 아내와 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던 터라 우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식당의 대표적인 메뉴는 오리구이지만 점심이고 둘이 먹기에는 과해서 아내는 우리밀 칼국수를 저는 녹두전에 식당에서 직접 빚어낸 쌀 막걸리를 택했죠. 제가 막걸리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죠. 지난가을에도 이곳을 찾았던 아내는 식당 앞 정원 한쪽 창고에 숙성 중인 '하몽(Jamon)'을 봤고, 그 자리에서 하몽은 판매 목적이 아닌 막걸리 드시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준다는 얘길 제게 전해줬어요. 아쉽게도 막걸리를 주문했음에도 '하몽'은 구경을 하지 못했죠.

도자기 안에 들어있는 막걸리 양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내가 두 잔밖에 거들지 않아 시판용 막걸리보다 많게 느껴졌어요. 술은 역시 낮술이라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도자기에 남은 술을 모두 비우고 나니 술 때문에 배가 부른 것인지 녹두전 때문에 배가 부른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식사 후 저와 아내는 식당 내 정원을 천천히 걸어서 식당을 빠져나왔고, 딸아이가 학교에서 마치고 돌아올 시간에 맞춰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봄 나들이 치고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내와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답답했던 마음은 어느새 뻥 뚫리고 둘이서 할 수 있는 얘기들을 하면서 20년 중년 부부만이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짧지만 알찬 시간을 즐기고 돌아왔네요. 역시 남들이 일하는 평일에 노는 게 어딜 가나 여유도 있고, 기분도 좋네요. 올해도 남은 휴가를 가족과 아내 그리고 저를 위해 알차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히 드네요.  




금요일 저녁 딸아이와 1월 계획했었던 일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마침 코로나 사태가 좋아지지 않아서 그 당시엔 포기했지만 개학도 하고 두 달만에 학교를 다녀온 딸아이도 지친 듯해서 바람도 쐴 겸 아이를 살짝 떠봤어요.


  "지수야, 내일 특별히 약속 있니?"

  "아니, 왜 아빠?"

  "딸~, 아빠랑 내일 상어 보러 안 갈래?"

  "오오~ 좋아요"


그렇게 의기투합한 저와 딸아이는 아내도 함께 갈 것을 설득했지만 아내는 딸과 둘만의 데이트로 양보할 테니 저보고 둘이 다녀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일 늑장 부릴 딸아이에게는 미리 오전에 나서야 하니 일찍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오랜만에 딸과 데이트여서 그런지 벼르던 상어 구경을 하러 가는 것 때문에 그런지  설렘 가득한 주말 밤이더라고요. 그렇게 밤은 깊어 갔어요.


다음날 아침, 금요일 하루를 쉬었더니 토요일인데 꼭 일요일인 것 같은 날이었죠. 모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딸아이와 저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고, 12시 30분이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섰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산 아쿠아플라넷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라 미루고 미뤘었는데 일산으로 이사 오고 4년이 넘도록 한 번을 지 못했네요. 딸아이가 이미 한 번 구경을 해서 더 가자는 얘기를 못했죠.


버스를 타고 주엽에 내려 호수공원 가는 길로 딸아이와 산책하듯이 걸어갔고, 10분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해서 아쿠아플라넷 입구에 도착했어요. 아쿠아 플라넷 1층 로비에는 주말을 맞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어요. 예상은 했지만 대부분 5세 미만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99퍼센트였죠. 혼자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들어가 구경할 용기는 없었지만 저도 다 큰 딸아이지만 딸과 함께 했더니 별로 이상할 게 없더라고요.

그렇게 들어간 아쿠아플라넷은 코엑스에서 봤던 만큼 어종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운 곳에 이렇게 구경할 곳이 있으니 좋긴 하더라고요. 딸아이와 전 특히 열대어나 물고기 그중에서도 특히 상어를 좋아해서 다른 건 볼거리가 없어도 상어만 제대로 볼 수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주의죠. 오늘도 제대로 구경한 것 같아 서로 만족스러운 하루라고 좋아했죠.


조금 안타까웠던 건 새 운동화를 사고 출퇴근 시에도 밟히지 않으려고 꽤나 애써서 한 번도 다른 사람들 발에 밟힌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에게는 예외가 없더라고요. 가만히 구경하다 여러 차례 그 고사리 같은 발에 밟혔어요. 어두운 아쿠아플라넷 안에서는 몰랐는데 출구로 나와보니 하얗던 운동화에 발자국이 여러 군데 있더라고요. 하하,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야죠.


딸아이와 서로 좋아하는 물고기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공원도 산책하며 맛있는 점심도 함께한 알찬 시간을 보낸 봄날 같은 하루였어요. 내일이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딸아이도, 저도 마음만큼이나 몸도 가뿐한 느낌까지 들더라고요.



딸아이와 아파트 입구까지 함께 들어와서 저녁 장거리를 봐서 들어가려고 혼자 집 앞 마트와 정육점을 들렀다 들어갔어요. 저녁에 먹을 고기와 쌈 거리를 들고 집에 갔더니 아내가 갑자기 밖에서 먹은 점심 메뉴로 잔소리를 하더라고요.

  

  "아니, 오랜만에 딸내미하고 데이트하면서 라면이랑 돈가스가 뭐예요. 좀 맛난 거 사 먹으라니까"

  "잉! 지수가 그래요? 라면 하고, 돈가스 먹었다고. 지수야, 제대로 얘기해야지. 분식집 라면 하고, 돈가스가 아니라 일식집 라멘 하고, 일본식 모둠 세트 먹었다고요"

  "아, 난 또 애 데리고 나가서 분식 먹었다고 그러는 줄 알았죠. 철수 씨,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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