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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30. 2021

작가가 아니라 아빠라서 가능했던 딸과의 100분 토론

딸아이와 함께 한 스펙터클 발표 준비

퇴근하고 집에 갔더니 딸아이의 얼굴이 무거워 보였다. 편한 복장으로 편복하고, 아내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딸아이가 들리지 않게 아내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딸아이가 왜 무거운 분위기를 피우고 있는지.


 "지수,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분위기가 꽤 그로테스크하네요"

 "에이 애 표정을 그렇게 표현하고 그래요. 그럴 일이 좀 있어요"

 "그래요? 뭔데요"

 "이따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요"


얘길 꺼낼 듯했던 아내는 그렇게 다시 저녁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난 아내를 도와 저녁 준비를 함께 했다. 아들이 저녁 학원을 간 날이라 오늘은 아내, 딸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만 저녁을 함께했다. 밥을 먹으며 딸아이가 무거운 분위기로 내려앉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지수야, 다음 주에 발표하는데 왜 벌써부터 걱정이야. 발표 자료 만드는 거 어려우면 아빠 보고 좀 도와달라고 하면 돼지"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조금 막막한 거 같아서. 그리고 발표 순서가 내가 첫 번째라 더 걱정돼"

 "무슨 발푠데요. 영희 씨"

 "학교 수행 과젠데  소설이든, 시든 선택 해서 나름대로 감상평, 해석 등을 자료로 만들고 발표하는 국어 과목 수행이라네요. 발표시간이 15분이라서 지수가 좀 걱정되나 봐요"

 "하면 되죠. 아직 시간도 있고. 작품 잘 선택해서 우선 목차부터 잡고 지수가 먼저 만들어봐. 아빠가 주말에 도와줄게"


아빠의 든든한 조력을 약속받은 딸아이는 그제야 편한 표정이 되어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 딸아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수행과제 얘기는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았고, 그 대화가 오고 간 후 며칠이 지났다. 당연히 딸아이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난 딸아이 나름 발표자료를 잘 만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해서 집에 가니 아내는 문제의 그 발표 자료 만드는 일로 딸아이와 얘길 하고 있었다. 모른 척 아내와 딸아이 대화를 차분히 들어보니 딸아이가 아직까지 발표자료를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눈치였다.


 "지수야, 발표 자료는 잘 만들고 있어?"

 "아니...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요"

 "김지수, 벌써 금요일인데 자료 언제 만들려고 그래. 며칠 시간 있었는데 아빠 보고 목차라도 좀 봐달라고 하지"

 "주말에 만들려고 했어요. 내가 만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아내와 딸아이의 1차전은 이쯤에서 끝이 났고, 아내는 딸아이가 제시간에 할지 걱정도 되고, 답답한 마음도 들었지만 딸아이가 큰소리까지 친 마당에 '설마'하는 생각에 더 이상 아이를 붙들고 닦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고, 토요일 오후가 되자 딸아이에게 맡겨놓은 나도 조금은 조바심이 났다. 늦은 오후 작성 중인 발표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난 딸아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따알~. 발표 자료 준비는 잘 돼가?"

 "아니.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

 "왜? 아직까지 목차도 못 잡은 거야?"

 "목차는 잡았는데 속 알맹이를 채워나가려니 뭘, 얼마나, 어떻게 채워야 할지 좀 막막해요"

 "에고, 지수야 빨리 얘기해야지. 그걸 지금까지 붙들고 있음 어떡해"


난 잡혀 있는 목차 이외에 작성된 부분이 없는 것을 보고 '보글보글' 찌개가 끓듯이 가슴속에 답답함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주말이 될 때까지 도움 요청도 않고, 발표 자료 준비에 소홀한 듯한 딸아이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짜증이 났고, 또 한편으로는 본인은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을까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발표자료 작성에 대해서 내 의견을 딸에게 얘기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조력은 이게 잔소리인지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말인지 나조차 헷갈릴 정도로 쏟아부었고, 딸아이는 듣는 내내 무언가 이해하는 모습이 아닌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이런 딸아이의 표정을 보고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머릴 스쳤고,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우선 월요일에 해야 할 다른 과제를 마무리하고 아빠하고 내일 다시 자료 준비를 함께 해보자고 다독였다. 그렇게 얘기하고 딸아이 방을 나오면서 딸아이에게 쏟아냈던 잔소리가 신경이 쓰였고, 방문을 닫아주며 책상에 앉아있는 딸아이의 어깨가 꽤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흐르고, 딸아이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인 일요일이 되었다. 오전까지 별 이야기가 없길래 딸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발표 자료 작성 여부를 물었다. 의외로 딸아이는 밝은 얼굴로 오후에 내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고, 우린 오후 3시부터 서로 간의 의견을 교환하며 발표 자료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감상평과 작품에 대한 해석 부분에서는 중학생 딸과 아빠의 대화인지 헷갈릴 정도로 딸아이의 깊이 있는 해석에 내 의견이 섞여 성인들의 독서 토론에서나 볼 것 같은 이야기들과 의견들이 나왔다. 두 시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의견을 내놓고, 그렇게 던져진 의견들을 다시 정리하였다. 딸아이는 그렇게 정리된 의견들을 발표 자료에 맞게 잘 작성했고, 완성된 발표자료를 우린 한 번 더 검토하며 주말 우리의 100분 토론은 끝이 났다. 긴 시간의 의미 있고, 색다른 대화에 나도 나지만 딸아이에겐 깊은 울림이 있어 보였고, 내게도 마냥 어리던 딸아이가 부쩍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멋진 시간이었다.


그렇게 자료 작성이 끝나고 딸아이는 오랜 숙제를 끝낸 가벼운 마음을 얼굴에 고스란히 담아 내게 '엄지 척'을 날려줬고, 딸아이의 '엄지 척' 시그널이 그 순간만큼은 초등학교 때 처음 받았던 '참 잘했어요' 도장보다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렇게 작성된 발표자료로 딸아이는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발표 준비를 진행했고, 닫힌 방문으로 들려오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은 음악처럼 내 귀에 잔잔히 들어왔다.


월요일 저녁 퇴근하자마자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저녁 식탁에 앉을 때까지 난 딸아이의 발표 결과를 묻지 않았다. 다만 딸아이의 밝은 표정으로 짐작만 했을 뿐.


  "철수 씨, 오늘 지수 발표 잘했데요"

  "아, 그래요? 지수야, 선생님이 발표자료는 잘 만들었데? 발표는 안 떨렸고?"

  "응, 발표 자료 잘 만들었다고 하셨고, 발표도 너무 잘했대. 다 아빠 덕택이에요"

  "하하, 칭찬받아서 다행이네. 이래 봬도 아빠 브런치 작가잖아"

  "지수 발표할 때도 하나도 안 떨었대요. 정말 옛날부터 앞에 나서는 건 누구 닮았는지 잘해"

  "응, 난 앞에 나서서 할 때 정말 안 떨려요. 오늘 발표할 때도 한 번도 안 떨었어"

  

딸아이와 평소에도 시간을 많이 갖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번 일과 같이 어떤 주제나 소재로 아이와 깊이 있는 대화를 해 본 것이 많지 않았다. 막내라 그냥 오냐오냐 끼고돌았었는데 이번에 딸아이의 생각이나 마음의 성장의 크기를 부쩍 실감했었던 경험이었다. 딸아이도 이번 일로 스스로가 만족해했고, 또 한 뼘 성장한 것 같다. 늘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게 가족이지만, 이런 가족과 깊이 있는 대화도, 때로는 불편한 마음도 자주자주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야 아이들의 성장도, 아이들이 느끼는 부모의 마음도 서로를 이해하고, 느끼는 시간이 쌓이기 마련이다. 이런 시간들이 결국 가족의 힘, 깨어지지 않는 결속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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