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부모님들이 얘기해도 아이들 이젠 듣지도 않아요. 잔소리는 제가 할 테니까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 잘 챙겨주세요'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입시 준비로 바쁜 날의 연속이다. 학교, 학원, 도서관 아들의 스케줄은 바쁘지만 늘 뻔하다. 당연히 그렇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생활하는 아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무겁다. 아들의 선택이었지만 금수저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숙명과도 같은 일을 아들도 동참하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얼마 전까지 아들을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들었다. 올 겨울 방학까지만 해도 스스로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해 일체 아들의 학습에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아내와 나의 교육철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겠다는 자식은 지원해주고, 하지 않겠다는 자식에게는 강요하거나, 시키지 않는다는 생각. 하지만 그런 생각도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에게는 조금은 예외인가 보다. 좀처럼 갖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던 아들에 대한 욕심이 자꾸 꼬물꼬물 솟아오른다. 그럴 때마다 야단치고, 충고한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여유는 고등학교 3학년들에게는 없다는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붙잡곤 한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건 아들만이 아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아들에 대한 작은 욕심이 내 마음을 아주 조금은 불편하게 했었다. 게다가 중간고사 이후 아들의 학업에 대한 태도가 조금은 느슨해진 것 같아 더 마음이 쓰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은 기간 전력투구해도 모자란데 아들의 태도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얼마 전 다녀왔던 아들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생각이 났다.
'집에서 부모님들이 얘기해도 아이들 이젠 듣지도 않아요. 잔소리는 제가 할 테니까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 잘 챙겨주세요'
아들을 믿고, 스스로의 결정과 선택을 지지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간고사를 치르고, 하루하루 시간은 갔고 어느덧 내신으로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아들의 마지막 내신성적인 기말고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아들뿐만이 아니었고, 아들의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아내와 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사실 아들은 시험 때마다 긴장을 많이 해서 장 트러블이 종종 생긴다. 아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시험이기에 시험 시간에 배 아픈 일이 발생하면 성적이나 향후 진로에도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늘 시험기간만 되면 아들의 장 상태를 묻는 게 일상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 시험부터 아들의 장 상태는 좋지 못했고, 이과인 아들에게는 문이과 공통과목인 '확률과 통계'가 내신 등급을 올리기에는 최적의 과목이었다. 하지만 장도 탈이 나고, 한 문제 실수를 한 것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첫날 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아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첫날 시험 보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아쉽지만 정말 잘 싸웠다고. 아들은 의연하게 시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내일 있을 시험 준비를 더 열심히 잘하겠다면서 아내와 날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시험 시간 배가 너무 아파서 잠깐이지만 선택을 위한 고민을 했었다고 했다.
'X을 바지에 조금 지리더라도 끝까지 시험을 봐서 내신을 방어할 것이냐, 시험을 망치더라도 시원하게 화장실을 다녀올 것이냐'
그러고는 '내가 원하는 대학을 포기해?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운데'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니 결정은 너무 쉬웠다는 얘길 했다. 물론 한 과목 때문에 그런 결과까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순간 아들의 생각이 절실하게 다가왔고, 결론적으로 결과가 어찌 되었든 바지에 지리지도 않았고, 이런 얘기까지 할 정도로 아들의 마음은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입시와 시험이 뭔지, 아이들을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세상을 만든 게 조금은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이후로도 며칠간 시험은 계속되었고 아들은 시험을 나름 열심히 잘 치렀다. 자신이 선택한 과목 중 최고의 난이도로 생각했던 과목에서도 최고의 성적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대부분 과목들이 기존에 받았던 내신 성적을 어느 정도 방어하는 점수들이 나왔다. 집에서 시험 본 결과는 잘 얘기하는 아들이지만 좀처럼 시험지까지 들이밀며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미적분' 시험지를 보여주며 아들은 한 껏 들떠 있었고, 첫날 만족스럽지 못했던 '확률과 통계' 과목은 아들 말로는 '미적분' 성적을 위해 제물로 바친 점수라고 했다. 녀석 기분이 많이 좋긴 좋았나 보다.
아들의 고등학교에서 치러야 하는 입시를 위한 시험은 모두 끝났고, 다섯 학기 동안 고생한 아들이 너무도 대견했다. 앞으로 수능이라는 큰 관문이 하나 더 남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것만 해도 아들은 충분히 박수받을만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들의 마음이 느슨해졌었다기보다는 지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슨해진 것과 지친 것을 구분 못했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하루다. 시험이 끝났더니 어느새 아들은 다시 원기 회복하며 밝은 얼굴로 가족의 대화에 참여한다. 그리고 역시나 하나뿐인 동생에 대한 애정표현도 잊지 않았다. 말로 애 먹이기, 잔소리하기, 화를 부르는 말투까지. 그래 그래야 현실 남매답지. 오늘로서야 우리 가족은 다시 예전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온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