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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첫 시험

딸아이 정신 건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by 추억바라기
아휴 난 정말 망했어. 어떡해요.



중학교 2학년이 된 딸아이는 작년과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진 듯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만 해도 초등학교 다닐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던 생활 습관이나, 학업을 대하는 태도 등은 어느새 2학년이 되면서 180도 바뀌어 버린 듯했다. 교과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듣는 건 자주 있는 일이 되었고, 모든 수행 과제들을 준비하는 열의가 예전에 비해 많이 강해졌다. 대부분 과목의 수행 과제를 만점을 받아오면서 새삼 달라진 아이의 변화가 너무도 놀라웠다.


"아빠, 나 내일 일찍 좀 깨워주세요. 7시 30분에요"

"잉? 지금도 12시가 넘었는데 주말에는 조금 자야지. 해야 할게 많아?"

"응, 다음 주에 국어, 영어 수행 과제 제출해야 해요. 아무튼 깨워줘"


열심히 하는 딸아이가 너무 신기하고, 기특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애쓰는 모습에 가슴 한편이 조금은 아려왔다. 이제 겨우 열하고 다섯인데, 성적 때문에 신경 쓰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책상 의자에 앉아있는 딸아이 어깨가 안 그래도 말랐는데 오늘따라 더 가냘파 보였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학창 시절을 보내던 딸아이에게 중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시험을 치러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첫 기말고사. 초등학교 때까지는 시험에 부담은 있었지만 미리부터 준비하고, 시험을 걱정하는 일이 없었던 딸아이였지만, 중학교 시험을 임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이미 4월부터 기말고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5월부터 시험 준비를 해야지, 시험 준비는 어떻게 해야지 등의 말을 입에 늘 달고 살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6월 하고도 중순이 넘었고, 아내와 난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기말고사에 신경이 곤두선 터라 상대적으로 딸아이의 첫 시험 준비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다. 그냥 당연히 준비를 잘하겠거니 생각만 있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집에 들어간 난 아내의 표정을 보고는 수상한 집안 분위기를 읽었다. 평소 같으면 거실에 있어야 할 딸아이는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고, 걱정이 됐던 난 가방을 내려놓고 슬며시 딸에게 말을 건넸다.


"지수야, 아빠 왔어. 학교는 잘 갔다 왔어?"

"응. 그냥 갔다 왔지 뭐"

아주 귀찮다는 듯 퉁명하게 딸아이는 대답했고, 더욱더 걱정이 되어서 난 한마디를 더 묻고서야 딸아이의 내려앉은 기분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네. 무슨 일 있어?"

"아휴, 난 정말 망했어. 2주 후면 시험인데 준비를 못했어. 어떡해요"


2주 앞으로 바짝 다가온 시험이 걱정이 된 듯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놀랠 일이지만 딸아이의 성격상 늘 겪어오던 일이라 아내와 난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아마 딸아이는 첫 시험이라 잘 보겠다는 의지는 있지만 막상 열심히 준비하기는 조금 귀찮고, 힘든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일 것이다. 난 딸아이에게 차근차근 남은 시험 기간 준비 잘해서 시험을 치르면 되고, 또 혹시나 시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괜찮으니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로 딸을 위로했다.


하지만, 딸아이의 시험에 대한 부담은 시험 며칠 전까지도 계속됐다. 입으로는 늘 시험 걱정을 하면서도 정작 시험을 며칠 앞두고서야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난 그런 딸아이의 모습조차 낯선 터라 신기하고, 대견했다. 그렇게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왔고, 아들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일에 딸아이의 첫 기말고사가 시작됐다. 물론 중학생이라 시험은 이틀 만에 끝이 나지만 워낙 걱정하며 보는 첫 시험이라 회사에서 업무를 하는 내내 딸이 걱정됐다. 딸아이 시험이 끝나고 하교했을 시간 즈음 난 아내에게 톡을 했고, 딸아이의 상태를 물어봤다. 아내는 딸아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얘기했고, 집에 오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퇴근해서 보니 딸아이는 아내가 오후에 설명했던 그 상태 그대로였고, 식사 후에도 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난 딸아이에게 이번 시험은 처음 본시험이고, 앞으로 있을 많은 시험들 중에 아주 작은 부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얘기했다. 이미 치러진 시험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내일 시험 준비를 잘했으면 하는 말도 함께 전했다. 크게 위로와 응원이 되진 않은 듯 보였지만 어찌 되었건 아이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고, 받아들여야 할 시험 결과였다. 마음이 쓰이고, 아팠지만 앞으로 계속 시험 때마다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으로 딸아이가 조금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길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짧지만 강렬했던 이틀간의 딸의 중학교 첫 시험은 끝이 났고, 딸아이가 기대했던 시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퇴근해 집에 들어간 난 집안 공기가 바뀐 걸 알고 아내에게 둘째 날 시험 결과는 괜찮은 거냐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지수, 오늘 시험은 잘 봤나 봐요. 거실에서 기분 좋게 짱구 보는 거 보면요"

"하하, 아뇨 오늘도 그다지 좋은 결과는 아닌 듯요. 게다가 어제 본시험 결과도 처음 채점했던 점수보다 한 문제씩은 더 오답 처리된걸요"

"우잉? 그럼 거실에서 웃는 저 아이는 제 딸이 아닌가요? 어제와는 분위기가 확 다른데요"

"에휴~, 직접 물어봐요"


딸아이는 내가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전날 기분과 크게 바뀌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소파에 앉아서 웃는 딸이 아침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고, 아내에게 말을 전해 듣지 못했으면 오늘 시험 결과가 무척 좋았나 보다 하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딸아이에게 난 시험 보느라 수고했다고 말하며 조심스레 시험은 잘 봤냐는 말을 물었다.


"지수야, 오늘 시험은 어땠어?"

"오늘도 영어도 잘 못 봤고, 한국사도 공부를 안 해서 그런지 망쳤어"

"그래? 다음번에 잘 준비해서 더 잘 보면 돼지. 그런데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아 오늘 개인적으로 조금 기분 좋은 일이 있었거든"


그러고는 입을 닫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딸아이는 시험을 보고 하교해서 집에 있다가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학교를 다녀왔다고 했다. 학교를 간 이유가 딸의 담임 선생님이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는 연락을 친구에게 듣고 친구와 함께 선생님 축구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다녀왔다는 이야기였다. 딸은 학기초부터 담임 선생님이 좋다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결국 오늘 기분 좋아진 건 다 선생님 때문이었다.


아이가 마음을 다쳤을까 노심초사했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딸의 무거웠던 마음은 좋아하는 선생님의 축구하는 모습만으로도 몇 시간 만에 풀려버렸던 것이다. 조금은 허탈하고,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그렇게라도 딸아이의 마음이 치유되고, 다시 원래의 딸아이로 돌아온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딸이 커가며, 성장하며 겪는 숙명 같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가끔은 낯선 딸아이의 감정에 조금 놀라고는 한다. 오늘도 딸 바보 아빠가 살짝 딸을 한 걸음 보냈다는 생각에 조금은 울컥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품 안에 있을 날이 더 남아있으니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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