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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도 없는데 세탁기까지 말썽이네

웃어넘길 수 있는 대화의 기술은 살면서 필요한 처세술이다

by 추억바라기

며칠 전 아내와 딸아이는 두 달 전부터 계획했던 고향길에 나섰다. 늘어나는 코로나 간염자 수로 오랜 시간 고민을 했지만 두 달 동안 들떴던 마음을 접기에도 아쉬웠지만 결정적으로 장모님이 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출발하기 며칠 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내는 '언제 오냐는' 장모님의 전화 한 통에 그만 포기를 선언하고, 고향 방문길에 나섰다.


아내와 딸아이의 고향 나들이를 배웅도 할 겸, 짐도 들어줄 겸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서울역까지 아내와 딸아이를 따라나섰다. 아침부터 찌는 듯한 더위에 몸은 힘들어 보였지만 오랜만에 방문하는 고향집이 좋았는지 아내와 딸아이의 표정만은 밝았다. 그렇게 서울역까지 도착해 KTX에 몸을 싣고 아내와 딸아이는 3박 4일간의 짧은 고향 방문길에 나섰다.


아내가 처가에 가고 없을 때 난 항상 아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웠다. 집안일을 하고,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밥을 챙기고. 자주 하던 일이지만 찌는 듯한 무더위에 몸을 움직이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은 직접 해서 챙기더라도 저녁은 가급적 배달 음식이 어떨까 아들과 협상까지 마무리했다. 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협상이 불가한 선택이 아닌 필수 종목이라 주말에 쌓였던 빨래를 돌리려고 세탁기 앞에 섰다. 안 그래도 아내가 처가에 가기 전 세탁기 사용에 대한 주의를 줬다. 우리 집 세탁기는 사용한 지 7년이 넘은 조금 오래된 녀석이다. 게다가 펜 벨트가 말썽을 일으켜 출장 AS를 두 번이나 받은 당장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랬던 세탁기가 아내 말로는 이틀 전에 탈수하는데 소리가 많이 났고, 조금은 수상한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세탁기 돌릴 때는 소음으로 민원 들어오지 않게 낮 시간에 돌리고, 뒷 베란다 문은 꼭 닫고 돌리라고 신신당부까지 한 터였다.


난 아내의 말대로 토요일 낮에 세탁기를 사용하려고 했고, 색이 짙은 빨래와 양말을 넣고 세탁기에 세제를 넣었다. 세탁기의 '동작' 버튼을 누르고는 잠시 시선을 세탁기 안에 두고 있는 사이 세탁기에 표시된 동작 시간에 55분이라는 시간이 떴다. 시간을 확인 후 몸을 돌리려는 찰나 세탁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몸을 돌려 세탁기 쪽으로 다시 가보니 '급수'가 되지 않았다. 다시 전원을 껐다, 켜서 동일하게 동작을 실행해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하필 아내도 없는 주말에 세탁기 고장이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옷이야 손으로 빨면 되지만 확인해보니 아들의 검은색 티셔츠들이 모두 빨래통에 있었다. 요즘도 독서실과 학원으로 공부하러 다니는 아들이 외출할 때 입을 옷이 없으면 안 되니 잠시 고민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셀프 세탁방'


이불 빨래를 하려고 처음 다녀온 뒤로 세 달만이었다. 급하게 해야 할 빨래를 가방에 욱여 놓고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서 선글라스를 썼다. 500원짜리 코인으로 세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우회해 가더라도 은행에 들러 현금을 찾아야 했다. 가는 길에 무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혀보고자 마트에 들러 시원한 커피까지 손에 들고서 세탁방을 찾았다. 무더위에 세탁방에는 사람들이 없었고, 아주머니 한 분만 이불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무더위에 냉방은 기본일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무인 셀프 세탁방이라 양쪽 벽에 회전하는 선풍기 한대가 전부였다. 잠시 흘러내리는 땀을 식힌 후에 세탁방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세탁기에 담아온 빨래를 집어넣고 미리 뽑아 놓은 세탁 세제를 들고서는 세탁기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액체 세제를 넣는 방법이 헷갈려서였다. 집에 있는 세탁기가 드럼세탁기가 아니다 보니 액체용 세탁 세제가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들 옷이 대부분이라 혹시나 아들 옷이 상할까 싶어 더 망설여졌다. 하는 수 없이 세탁방에 먼저와 이불 빨래를 돌리시는 아주머니께 물어보기로 결심하고, 아주머니를 불렀다. 60대 이상으로 보였지만 어르신으로 부르기에는 조금은 이른 나이어서 호칭을 부르지 않고 물었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쭤봐도 될까요?"

"응?, 아 네 그래요"
"혹시 세탁 세제 넣는 방법을 아시나요? 그냥 빨래할 옷 위에 뿌리면 되나요?"

"그냥 그 위에 뿌리면 돼요. 아줌마는 세제를 집에서 가져와서 그 세제를 쓰진 않지만"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그 세제 하나면 돼요? 혹시 세제 부족하면 아줌마가 가져온 세제 써도 돼요"


틀린 말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주머니의 말투는 어색했고, 아줌마를 강조하면서 나이가 많이 들지 않았다는 말인지 아니면 말을 건넨 날 보며 나보다 당신께서 나이가 훨씬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지 어감이나, 어투 모두 어색했다. 어찌 들으면 내 나이가 혹시나 어려 보여서 말을 놓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나의 희망사항일 뿐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난 세탁방 실내도 햇빛 때문에 밝아서 그 순간까지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까지 착용했더니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모양새였다. 아마 나이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듯싶다. 집어넣은 빨래들도 대부분 아들 옷이다 보니 아마도 조금은 더 영(Young) 한 분위기로 연출이 되었을 듯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나, 오해할 상황들을 접할 때가 있다. 확실하지 않은 애매한 상황이 오거나,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에는 가급적 상황에 맞닥뜨리는 서로 간에 기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융통성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기분 좋은 오해로 넘어갈 수 있는 대화의 기술은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처세술이다. 상대방의 오류나, 문제가 명확하지도 않은데 의혹이나, 의심만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문제 자체의 접근이 아닌 당하는 사람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한다는 오해의 소지가 크다. 콕 집어내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하자고 던지는 말들이 상대방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신 있는 말이나, 행동들도 상황에 맞게 표현하는 현명함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겸손함을 빛낼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길이다. 조금은 똑똑함을 감추는 미덕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이유다.


그나저나 처음 보는 아주머니와 내가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봤다. 아주머니가 '아줌마'를 강조하면서 말한 이유가 당신께서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음을 강조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어려 보여서 당신이 나 보다는 나이가 많음을 강조했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날 어리게 본 아주머니께 감사할 상황이고, 전자의 상황이라도 내게는 손해 될 상황은 아니다. 이래저래 아주머니의 의도치 않은 입담에 난 오늘도 또 한 수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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