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느닷없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아내와 난 어리둥절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학업 관련해서는 아들을 전적으로 믿고, 맡기는 우리 부부지만 이번만큼은 조금은 무모한 도전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아들은 고등학교 5학기 내내 수시 그것도 학생부 종합을 준비해왔고, 그 기간 동안 수능 정시는 눈곱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아들이다. 빼곡한 생활기록부가 그 사실을 대변하듯이 아들은 철저하게 수능을 배제한 체 생활기록부에 채워질 활동들과 내신들로 5학기를 보냈다.
"아들, 이제 와서 수능 준비 너무 시간이 없지 않을까? 게다가 넌 교과로도 생각하니까 수능 최저 맞추려면 선택해야 할 과목을 열심히 파도 시간이 많은 게 아닌데"
아들은 올해 들어올 때만 해도 3학년 1학기에 전력투구해서 자신이 목표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수능 최저를 고려해서 선택 과목들도 겨울방학에는 인터넷 강의를 듣는 준비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쯤 되면 공부에 조금이라도 뜻이 있었던 아이들이면 아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간 2년보다 더 열심히 할 거란 걸 아들이나, 우리 부부는 간과하고 있었다. 아들은 2학년 때보다 열심히 했지만 함께 열심히 하는 친구들 덕에 내신 등급이 기대만큼 오르진 않았고, 오히려 그런 결과 때문에 아들은 조바심만 커져버렸다.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시험 채점의 결과로 난 아들의 진학 가능한 학교들의 목록을 뽑아봤고, 아들과 나란히 앉은자리에서 아들에게 조심스레 얘기를 건넸다. 아들은 가고자 하는 학과는 너무도 명확해서 어차피 해당 학과 위주의 학교 선택이 우선이었고, 아들의 내신 성적으로 수시로 갈 수 있는 학교들을 적정과 약간 상향을 기준으로 선별해 봤다.
"아들, 기말고사까지 끝났는데 생각하고 있는 대학은 정해졌어?"
"가고자 하는 대학은 예전부터 있었죠. 하지만 가고 싶다고 다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이제 성적에 맞춰서 알아봐야죠"
학기 초보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아들의 모습에 조금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아들의 지나온 시간이 조금은 아쉬웠다.
"안 그래도 아빠가 아들 내신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대학을 좀 확인해 봤어. 어차피 과는 화학공학과지?"
"네, 전 학교를 낮추더라도 학과는 맞춰서 갈 거예요"
"아빠가 좀 알아보니 A 대학, B 대학, C 대학 정도면 아들이 지원 가능할 거 같던데. 입학 정원도 많고"
"아빠, 거긴 내가 받은 내신으로는 어려워요. 저도 알아봤어요"
아들의 반응에 1차적으로 놀랐지만 내가 더 걱정하는 건 이제야 느껴지는 아들의 절박함이 나도 입시생 학부모라는 생각에까지 미치니 지금까지 아들을 눌러왔던 짐의 무게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얘기가 오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들은 정시를 준비하겠다는 중대 발표를 했다. 걱정 반, 우려반의 심정으로 난 아들에게 정시를 준비해보겠다고 한 이유를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현재의 내신으로 지원 가능한 대학이 애매해진 상황이라 정시로 9월 모의고사까지 최선을 다해서 모의고사 등급을 조금만 끌어올리면 내신으로 지원할 수 없는 대학도 지원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게 아들의 얘기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두 달이 조금 더 남은 시점에서 모의고사 한 등급 또는 두 등급씩을 올리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님을 잘 알기에 아들 설득에 조금 더 애써봤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뜻을 꺽지 않았고, 결국은 아내와 난 아들의 결정을 항상 하던 대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능 준비를 위한 아들의 학업은 시작됐고, 수능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던 국어 과목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사교육 하나를 더 늘였다. 아들에게 불과 몇 달이었지만 아내는 생각지도 못한 생활비 지출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인터넷 강의와 학원, 독서실을 오가며 열심히 준비한지도 3주가 다되어갔다. 아들은 자신이 세워놓은 목표 때문인지 더 이를 악물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은 지났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더위 때문인지, 가중된 학업 때문인지 밝았던 아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마 전 담임 선생님께 몰래 상담을 받고 온 아들이 집에 들어와 가방에서 출력된 몇 장의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아들이 꺼내놓은 출력물은 선생님이 상담하며 지원 가능한 학교 목록을 뽑아줬고, 아마도 부모님과 집에 가서 얘기해보며 의논해보라고 선생님이 주신 것 같았다. 원래 아내와 난 아들 최종 상담 때는 아들과 동행하여 상담을 받기로 했었고,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이 함께 오실 줄 알았는데 아들만 나타나서 조금 놀랐다고 아내에게 연락이 왔었다. 그렇게 아들이 혼자 상담을 간 이유가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기대를 내비쳤고, 이런 내 기대가 아들에겐 부담이었던 것 같다고 선생님께서 얘기해주셔서 우린 아들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나 그냥 수시로 준비할래요. 선생님이 지금 와서 정시 준비는 무리라고 하셨어요"
"응? 몇 주전에 아빠가 말릴 때는 할 수 있다고 얘기하던 아들은 어디 간 건가?"
"선생님하고 얘기 많이 해봤는데 선생님이 수능 최저 맞추는 데 전념하라고 그러시네요"
"아빠도 너 정시한다고 할 때 똑같이 말했는데..."
결국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였나 싶었다. 결국 아들의 중대발표는 정치가들의 발언과 같이 3주 만에 말 바꾸기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아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내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해도 될 텐데 너무 쉽게 결정하고, 쉽게 포기한 아들을 조금은 못마땅해했다.
"아들, 그럼 너 2주밖에 안 나간 국어 과외하고, 고모가 해주는 영어 과외는 어떻게 할 거야"
"수능도 얼마 안 남았고, 수시로 갈 건데 이젠 그만둬야죠"
"그럼 내일 네가 직접 선생님한테 수업 가서 얘기해. 그리고 목요일 고모한테도"
결국 아내는 당황스러워하는 아들의 표정을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아들에게 아들 자신이 벌린 사고를 직접 수습하라는 처벌을 내렸다. 곁에서 내가 조금 말려보려고 했지만 아내의 뜻이 너무 단호해서 더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음날 아들 몰래 아내는 아들 국어 과외 선생님과 영어를 봐주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고, 사전에 양해를 미리 구해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아들의 3주 간의 결연한 결심은 담임 선생님의 한 시간 상담으로 포기가 되었고,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아들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수시로 갈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간 힘들었던 고등학교 생활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해방될 걸 기대했던 아내와 나지만 막상 아들의 조바심을 대하고 나니 그 상황에서 달리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여유란 걸 생각했던 우리에게 아들의 정시 준비 발표는 다시 모든 시간을 쥐어짜야 하는 아들에게도, 그걸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또 한 번의 고통이었을 테다. 하지만 허무하게 끝낸 아니 정확히는 포기한 아들의 결정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머리로는 하지만 아직은 섣부른 결정과 손쉽게 포기한 아들이 아주 조금은 얄밉다.
"동생아, 공부 좀 해라. 그렇게 놀면 나중에 정말 큰일 난다고.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오늘도 평소같이 동생을 괴롭히는 아들을 보면서 마음만은 한결 편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만 더 믿어보고, 지켜보는 게 부모로서 할 일임을 알기에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대화하고, 웃고 행복한 일상을 지낸다. 늘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