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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11. 2021

걸으면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뽕도 따고 임도 본다

올해도 제주 올레 가려고 오늘부터 예열(豫熱) 중입니다

운동화를 고쳐 매고 가벼운 차림으로 아내와 집을 나섰다. 바람도 산들산들 부는 날씨가 가을이라고 부르기에 가장 어울릴만한 좋은 날씨다.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 틈새로 들어오는 내음이 가을 특유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영희 씨, 오늘은 어떤 코스로 다녀올까요?"

 "오늘은 큰맘 먹고 좀 걸을까요? 호수공원 갔다가 오는 거 어때요?"

 "나야 좋죠. 영희 씨 괜찮겠어요? 왕복하면 못해도 8 킬로는 될 텐데"


난 아내와 가끔 산책을 다닌다. 최근 아내의 컨디션도 좋지 않고 날씨도 도와주질 않아서 최근에는 자주 나오지 못했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녁 한 시간 정도는 종종 나가서 걷고 오곤 했다. 코로나로 카페 데이트가 꺼려지는 최근에는 걷는 내내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운동과 데이트를 함께 즐겼다. 굳이 따지자면 일석이조이자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고,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표현이 딱 맞는 듯하다.


아내와 평소 다니는 코스는 두세 곳으로 정해져 있다. 모두 집 근처 산책로를 따라서 코스가 정해져 있고, 모두 한 시간 남짓 걷고 오는 코스이다 보니 4~5 킬로 이내로 제한적이다. 하지만 아내가 오늘 제안한 코스는 평소보다는 긴 코스다. 지난주에도 백화점에 갈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들어올 때 걸어오자고 하더니 오늘은 아내가 정말 큰 맘을 먹은 듯 보였다. 걷기 좋아하는 난 아내 덕에 오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듯싶었다.

 

집을 나선 지 이십여분 후곡 마을을 따라 걸어가는 산책길에 많은 사람들이 걷기와 자전거 타기 등으로 행복한 가을 날씨를 즐기는 모습이다. 호수공원까지 걷는 산책길을 처음 나서는 아내에게는 모든 풍경이 낯설지만 싫지는 않아 보인다. 호수공원까지 가는 길에 큰 아이가 다니는 학원가도 지나고, 가끔씩 외출 나오면 찾는 번화가도 지났다. 등골을 따라 땀방울이 흐를 때쯤 호수공원이 눈앞에 들어왔고, 아내는 목표한 절반의 완성에 조금은 더 밝은 표정이 됐다.


 "철수 씨, 이렇게 오니 금방이네요. 나오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그렇죠. 이쪽 산책로 따라서 오니 지루하지도 않고, 걷기에도 정말 좋네요"

 "바람이 이렇게 부니 많이 덥지도 않고. 우리 호수공원 들어가면 거기도 조금 돌고 돌아가요"

 "그래요. 힘들면 공원에서 잠깐 쉬어도 되고요"  


지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아내는 몸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았다. 몸이 힘드니 에너지도 없고, 당연히 먹는 것도 시원찮았다. 늘 아내의 몸 상태가 걱정이었던 내게 최근 며칠 아내의 컨디션은 어느 정도 회복하는 걸로 보였고, 오늘은 평소 아내의 모습 같아서 너무 보기 좋았다. 아내가 제 컨디션을 찾으니 오늘 이렇게 함께 산책도 하고, 데이트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사실 최근 몇 주 사이에 아내에게 꺼내려고 했던 얘기가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내가 내게 주는 선물 같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최근 아내의 몸 컨디션을 보며 아무리 일 년에 한 번이라고는 하지만 제 컨디션이 아닌 아내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건 너무 미안하고, 이기적인 생각처럼 느껴졌다. 하긴 아내의 몸 상태와 상관없이 불과 한, 두 달 전만 해도 올해 나만의 여행은 생각도 하기 힘들었다. 바쁜 일상에 지쳐 평일에 하루, 이틀 시간 내는 일은 사실상 어려워 보였고, 그렇다고 주말로 계획하는 건 내가 원하는 여행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퇴사 일정과 이직 계획에 잘 맞물려 난 다시 올해도 지금까지 지켜왔던 나만의 루틴을 지킬 수 있는 계기가 생겼고, 아내의 컨디션을 봐가며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었다. 호수공원을 돌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우린 잠시 쉬었고, 싸간 물로 목을 축이는 아내에게 난 내 작은 욕심에 동의를 구했다.


 "영희 씨, 올해도 나 제주도 다녀와도 될까요?"

 "아, 언제 가게요? 올해에는 아들하고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민수하고 갈려면 12월은 돼야 하는데. 12월에는 시간 내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10월에 평소같이 혼자 다녀올게요"

 "그러네요. 민수는 수능도 있고 하니. 그렇게 해요"


아내는 내가 조금은 가졌던 불편한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편안한 미소로 흔쾌히 동의했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내와 호수공원까지 조금 더 걷고 나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의 산책은 이제 곧 다녀올 제주 올레길 걷기의 예열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평소 걷기를 즐기지만 제주 올레길을 걷는 것처럼 하루에 이십 킬로 가까이를 걸을 기회가 일상에서는 찾기 어렵다. 물론 마음먹고 걸으러 나가면 걸을 수야 있겠지만 평소 산책 코스로는 실전 연습으로는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내 마음을 먼저 안 것처럼 아내가 오늘 제안한 산책 코스는 오랜만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걸었던 코스였다. 아내 덕분에 사전에 예열이 잘 되는 듯싶다.


산책을 하고 며칠이 지나 이직하는 회사의 최종 입사날짜를 정했다. 조금은 여유 있는 입사로 계획했던 날짜에 제주를 찾을 수 있게 된 난 저녁나절에 소파에 앉아 열심히 제주 왕복 비행 편을 알아봤다. 날짜는 이미 정했으니 우선 최대한 빨리 비행 편부터 예약해야 했다. 부지런히 찾아본 덕에 적당한 시간과 가격에 비행 편을 예약했고,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딸아이가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아빠, 어디 가?"

 "응, 아빠 제주도 다녀오려고"

이 말을 들은 딸아이가 장난처럼 무릎을 꿇고서는 볼맨 소리로 내게 하소연을 했다.

 "우~앙. 나도 제주도 가고 싶은데. 나도 갈래~"

이런 딸아이에게 아내가 한 마디를 건넨다.

 "따님, 아빠도 일 년 고생했잖아. 아빠만의 시간이 일 년에 한 번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아내의 응원에 때마침 딸아이의 볼맨 소리에 피어올랐던 미안함이 조금은 상쇄되는 느낌이 든다.

 "고마워 영희 씨. 지수도 이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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