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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Nov 11. 2021

십 년 만에 경로를 변경하였습니다.

21년 차 직장인도 첫 출근은 긴장되네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은 빛이라고는 없는 어둠 자체의 그것 그대로다. 서둘러 나와서 아내가 정성스레 차려준 밥상을 받아 들었다. 출근길이 길어진 탓에 아내가 출근 준비 시간이라도 아끼라고 내 기상시간에 함께 일어나 준비해준 아침상이다. 앞으로는 계속 호사를 누릴 듯싶다.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아내다.


아내의 조력 덕에 출근 준비가 일찍 끝났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마을버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다음 차를 탈까 시간을 봤지만 배차간격이 애매하다. 괜히 여유 부리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는 타이틀을 받기 싫어서 조금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오늘부터 긴 출근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잠깐 이동하는 마을버스에서 고민을 해봤지만 책 읽고, 짧은 글 쓰는 것 외에는 아직까진 딱히 계획이 서지 않는다. 마을버스에서 하차해 내린 지하철역에는 마치 날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것 같이 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출발역이다 보니 출발시간이 되기 전까지 문을 열고 좌석을 채우기 위해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지하철이 아닌 개인별로 좌석이 있는 기차 같다. 기다려준 차에 올라타 빈자리 중에 사람이 제일 적은 자리에 골라 앉았다. 어차피 두, 세 역만 지나면 모두 채워질 자리지만 조금이라도 출근길 여유를 더 만끽해 보기 위해서다.


2주 만에 출근이다. 그것도 십 년을 다녔던 직장이 아닌 새 보금자리로의 첫날이다. 기분이 설레거나, 긴장하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다. 그런 기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느지막이 이직한 마음이란 게 오히려 생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이나 즐거움에 대한 마음이 더 크다. 책을 펴고 책장을 넘기지만 막상 오늘 볼 직원들의 첫인상과 회사의 분위기가 더 궁금해서 인지 활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는다. 한참을 머릿속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올려다본 다음 정차역 표시에 긴 시간 빠졌던 상념에서 다시 출근길 지하철로 돌아왔다. 한참을 달려왔다 생각했는데 이제 절반을 지났다. 정말 기차로 여행 가듯이 긴 시간을 달린다. 멀긴 다는 생각이 들 때쯤 열차는 어느새 내려야 할 도착 역임을 알린다. 그 안내방송이 새로운 시작힘차게 알리는 행진곡 같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내 기분 탓일 것 같다.


일찍 출발한 덕에 20여분이나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작지만 단단한 회사, 내게 새로운 도전의 발판이 될 새 보금자리가 그곳에 있었다. 사무실 확장으로 아침부터 어수선하지만 그 어수선함이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십여분 후 출근하는 직원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반갑게 맞아준 대표님이 출근 첫날에 기분 좋으라고 농담을 건넨다.


 "김 이사, 김 이사 출근해서 넓게 사무실 쓸 수 있게 확장하는 거잖아"


가볍게 농담들이 오갔고, 남아있던 새로운 회사에 대한,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솜털같이 가벼워졌다.  새롭게 시작한 달의 첫 번째  월요일이라 화상을 통해 전 직원이 회의를 진행했다. 지금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과는 인사를 모두 나눈 상태였지만 지방에 있는 직원들과는 첫 대면 아니 첫 비대면이었다. 대표님의 소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고, 한 달 동안 각 부서들의 진행상황과 이번 달 계획에 대한 업무보고가 이뤄졌다. 다녔던 다른 회사와 큰 차이 없이 업무 회의 때 보고자를 제외한 어떠한 소음도 없이 빨리 진행됐다. 그렇게 몇 개의 부서 발표가 끝나고, 대표님의 간단한 격려와 당부가 이뤄지고 나서야 비대면 첫 회의는 다음 달을 기약하며 그렇게 끝이 났다.


첫날이라 업무 환경 세팅으로 하루가 마무리 지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계획적으로 이뤄지진 않는 것처럼 오늘 내 하루 예상되었던 계획도 역시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이사 직책을 달고 들어왔다고 해서 무언가 고상한 시작이나 대단한 대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첫날부터 다음 주까지 제안해야 할 사업에 대한 제안 작업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오후부터 회의실에 갇혀서 진행 작업에 대한 리뷰를 들어야 했고, 긴 회의 후에 작업해야 할 일들이 눈덩이처럼 떨어졌다. MBTI 테스트 때 나왔던 결과와 같이 난 용의주도한 계획형 인간이다. 그 계획이 틀어지거나 계획되지 않은 일들이 끼어듦을 못 견뎌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내게 이직 첫날의 그림에는 오늘같이 데드라인이 짧은 제안 작업은 없었다. 하지만 스타트업이라는 생태계로 이직을 결정한 나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고, 빨리 익숙해져야 할 분위기다.


당장의 빛을 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알았고, 새로운 자릴 찾아든 내 선택에 스스로에게 응원과 격려가 필요할 때다. 내 인생의 마지막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입사했고, 단지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일 뿐이다. 그 긴긴 날들의 하루라는 아주 작은 시간임을 알기에 서둘러 작업된 문서를 꼼꼼히 그리고 재빠르게 훑어본다. 직급이나 직책이 주는 무게가 가볍지는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먼저 해내고, 익혀야 할 건 제대로 익혀 새롭게 자리한 보금자리의 구성원으로 뿌리내려야겠다. 아직은 더 지나 봐야겠지만 난 지금 옮겨온 이 자리가 싫지 않다. 큰 회사도 아니고, 시스템화 되어있지도 않지만 지금부터 내가 함께 만들고, 꾸미고, 키워가야 할 회사라는 생각에 조금 더 의욕이 솟는다. 오자마자 무겁고, 막중한 직무와 직책을 받았지만 옛말에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난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 지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게 맞는 옷이고, 자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은 십 년 만에 옮긴 회사로의 출근 첫날이다. 더는 깊게 생각 말고 그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업무도, 환경도, 사람도 익숙해질 것이고 지금 같은 낯선 감정은 더는 내게 깃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그 처음이 있기 마련이다. 난 더 이상 그 처음의 하루 속에 이른 속단과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낯설기 마련이니까. 나도 결국 지금 일들이 익숙해지고, 숙련되기를 기다리면 된다. 단지 지금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며 그렇게 하루, 일주일 그리고 한 달을 살면 될 뿐이다. 어느새 시계는 퇴근을 알리고 난 오늘보다 조금 더 익숙해질 내일을 기대하며 긴긴 퇴근길에 오르면 될 뿐이다. 남아서 고생할 동료들에게 내일을 기약하는 인사는 잊지 않고 난 10년 만에 새롭게 무대를 바꿔 올랐던 입구로 첫 퇴근을 한다.


 "먼저 퇴근합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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