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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an 21. 2022

난 오늘도 밸런스 게임 중입니다

게을러진 내 몸을 오늘도 위로합니다

게으름 병에 걸려 버렸다. 끝없는 게으름이 나를 덮쳐왔다. 작년 말부터 늘어난 출퇴근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길어진 출퇴근 시간이 부담이 됐지만 한편으론 길어진 출퇴근 시간이 기대가 되기도 했었다. 길어진 출퇴근 시간이 흘러간 세월만큼 떨어진 내 신체 나이를 감당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신체를 걱정해야 할 당사자인 난 늘어난 시간에 비례해 늘어날 독서시간을 걱정했다. 이전 직장을 출퇴근할 때는 지하철 이동시간이 한 시간 남짓이었다. 이 시간 동안 읽었던 책의 양은 매달 평균 네 권정도였다. 하지만 이직한 회사의 지하철 이동 시간은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이나 되니 당연히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독서량도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컸었다. 그에 따른 책 값도 1.5배에서 2배가 될 거라는 조심스러운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읽은 책의 수는 일곱 권이 고작이다. 독서가 습관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많은 수일지 몰라도 평소 같으면 열한두 권은 이미 읽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90분이나 되는 시간 아니 왕복 세 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난 오롯이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시간을 활용하지 못했다. 이렇게 일상을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어간다. 그렇게 내 일상의 시간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예전에 비해 이른 기상과 이른 출근으로 집을 나설 때면 거리는 깊은 밤에 빠져있다. 지하철은 출발하는 역이다 보니 내게 늘 좋은 자리를 양보한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난 늘 책부터 폈다. 내 하루는 예전과 다르지 않게 책으로 시작할 수 있자만했다. 하지만 이른 기상에 좁은 전동차 가득 늘어난 승객들 때문에 산소가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답답해진 공기도 공기지만 긴 시간 쓰고 있는 마스크에 자리까지 확보했으니 모든 조건이 졸음을 향하게 만든다. 한참을 자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이내 쏟아지는 잠은 작은 의지마저 꺾어버린 채 펼쳤던 책장을 덮게 만들었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졌다 깨길 반복하다 보면 지하철은 어느새 회사 근처 역에 도착하곤 했다.


난 게을러졌고, 그렇게 늘어난 잠이 늘 걱정이다. 어떤 날엔 지하철에 짧은 잠을 자면서 꿈도 꾸곤 한다.  글 쓰기는 고사하고 책 읽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날이 늘어난다. 가끔 예전 후배들이 연락이 와서 이직한 곳의 출퇴근을 걱정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다. 잠이 늘었다고. 예전보다 잠잘 시간이 세 시간이나 생겼다고.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깨어서 글을 쓰니 왠지 돈 번 느낌이다.


요즘 난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해졌다. 최근 사, 오 년 사이에 가장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해가 바뀌고 나이 앞에 숫자가 오자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는 요즘 내 일 나이는 거꾸로 가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방 출장을 다니고 혼자 하던 업무가 익숙해져 있던 몇 년간의 틀을 깨고 여러 팀을 운영하는 관리자 역할까지 맡았다. 익숙하지 않은 업무라 더 신경 쓰는 것도 있지만 잘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이미 걷고 있는 나를 뛰라고 재촉하곤 한다.


오늘도 9시가 되기 전부터 난 분주하다. 하루 동안 할 업무를 정리하고, 어제 수신된 메일부터 체크한다. 혹시나 계획했던 일들 중에 누락된 것들이 없는지 찬찬히 확인해본 후에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높은 우선순위의 업무를 진행한다. 이렇게 오전 업무를 하기 위해 앉아있은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움직여본다. 잠깐의 스트레칭으로 굳어있던 몸을 풀어주면 다시 한 시간 동안 오전에 업무 지시, 협조받아야 할 일들을 담당자들과 화상회의 혹은 유선으로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이미 시계는 정오를 훌쩍 넘는다. 늘 바빠 부지런을 떤다. 부지런해지기 위해 부지런 떠는 게 아닌 일을 하다 보니 부지런해져 버렸다.


하루 종일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 밖은 어느새 출근 때와 같이 어둠이 내려와 있다. 하루를 꽉 채워 일하고 나면 퇴근길 내 몸뚱이는 지칠 대로 지쳐 또 한 번 깊은 잠에 빠졌다 나오길 반복한다. 앉을자리가 있는 지하철이 고마울 뿐이다. 많아진 업무가 최근 여유를 갖고 2, 3년 일한 것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여러 종류의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이직한 회사에서 정신없이 바쁜 걸 보면 아마 업무도 총량의 법칙이 있는 듯하다. 지금과 같이 일하다 보면 또 어느새 그 총량이 또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부쩍 밸런스 게임이라는 걸 방송에서 많이 보게 된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조건을 놓고 선택하는 게임의 일종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일하며 월 백만 원 벌기와 싫어하는 일하며 월 천만 원 벌기, 평생 떡만 먹기와 평생 빵만 먹기 등과 같이 모두 좋을 수 없는, 아니 무언가 극단적이기까지 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임이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으로 누가 봐도 고르기 쉬운 예제는 이 밸런스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은 인생에서 모든 걸 만족하며 살 수 없는 현실을 작위적으로 그려낸 씁쓸한 우리 시대 자화상과도 같은 게임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무언가 공평해 보이는 이 게임이 누군가에겐 크게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내겐 이 밸런스 게임이 주는 교훈이 위로가 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예전에 비해 높은 자존감으로 삶을 채워간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길어진 출퇴근 시간, 글 쓰기나 독서엔 게으름을 피울 수밖에 없어졌다. 얼마 전까진 하기 싫어했던 업무를 하며  떨어진 자존감을 글쓰기와 독서가 밸런스를 맞췄었다. 지금의 생활에 백 퍼센트 만족하며 살긴 어렵지만 차츰 업무적응하고, 익숙해지면 내 일과 삶에 다시 밸런스가 맞춰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오늘도 길고 긴 퇴근 지하철에 몸을 기댄다. 곧 쏟아질 잠을 흔들리는 지하철 명당자리에서 조심스럽게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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