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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Feb 03. 2022

떠나는 동료에겐 이유가 있다

당신의 그런 행동에서 과거 내 모습을 투영해 봤어요

"팀장님, 이렇게 살다가 저 제명에 못 죽을 거 같아요. 회사를 위해서 많은걸 희생했는데 제게 돌아온 건 쌓여가는 일과 상처받는 저만 있는 거 같아요. 절대 바뀌지 않아요"


순간 오래전 A은행 프로젝트 때 당시 본부장을 붙들고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오버랩되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동료보다 한참은 더 어린 나이었지만 그때의 나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동료와 비슷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난 관리자로서 그 동료의 조금은 무례한 태도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예의에 관한 주의를 주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인상부터 조금 거칠어 보이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사투리를 조금 세게 써서, 혹은 자신의 감정에 조금은 솔직해서 그렇다고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감정 표출이나 아랫사람에게 하는 습관적 거친 말투가 종종 불편하게 들렸다.


그러던 오늘도 갑자기 터져 나왔다. 그에겐 나이도, 직급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터져 나오는 그의 감정의 폭발은 참고 듣고 있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내가 없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불만을 쏟아냈기에 말을 막아설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감정이 차올라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직원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겐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일일 수 있다. 십여 년 전 나도 이 동료와 비슷한 이유로 울분을 여러 차례 터트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동료처럼 무례하거나, 예의가 없지는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었다. 수차례의 업무 변경 요청이나 프로젝트 담당 변경 요청 때로는 퇴사의 칼까지 빼들면서 당시 관리자에게 어리광도 부렸다가 겁박도 해봤었다. 당시 내게도 큰 무언가를 바란 것이 아닌 그냥 그 평범한 일상을 누리길 희망했었다. 그땐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젝트 진행 당시 하루의 시작 시간은 늘 같았지만 끝나는 시간은 매번 달라졌다. 업무가 일찍 끝날 것 같으면 은행 담당자 요청으로 식사 자리에 불려 가고, 일찍 갈 핑계를 만들려고 하면 서비스 장애로 새벽녘이나 되어야 일이 끝나곤 했다.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6개월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끝없이 갈망한 건 프로젝트 종료와 평범한 일상이었다. 딸 바보임을 자부했던 나는 매일 아이의 자는 모습만 보는 딸 천재가 되어가는 듯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두 아이 육아를 오롯이 맡았던 아내에게도 당시의 일상을 떠올리면 씁쓸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때였다.


그렇게 불만과 불평의 세월을 보내며 6개월이 지났고, 어찌 되었건 프로젝트는 무사히 종료되었다. 끝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긴 시간이었지만 그 또한 지나갔음을 6개월이 지날 즈음 깨달을 수 있었다. 고생 후에 낙이 있다고 했던가. 높은 난이도의 프로젝트 완수를 사유로 난 그 해 특별 진급에 팀장의 직책까지 받았다. 씁쓸했지만 상처만 남은 훈장은 아님을 알았기에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고, 또 한 번 성장하는 계기가 됐던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상주했었던 건물 앞을 지날 때면 6개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곤 한다. 드라마 미생에서처럼 늘 긴장감에서 떨던 신입사원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계약관계상 어쩔 수 없는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학습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내게는 두고두고 회상될 것이다.


오늘 내 앞에 있는 동료도 나와는 다른 온도차겠지만 자신이 꿈꾸는 하루가 있을 것이다. 저마다 생각해오던 직장생활의 눈높이가 있겠지만 현재 삶의 만족도는 절대적일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삶의 가치는 '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아실현'이 가장 큰 가치의 척도일 수 있다. 동료의 무례한 태도나 배려 없는 언행들은 분명히 잘못됐지만 동료의 불만과 불안감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자신이 생각했던 삶의 가치 실현과는 크게 어긋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안타까워했기에 잘못된 방법과 원치 않는 수단이었지만 제어가 가능한 선을 넘었음을 알면서도 터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떠한 사탕발림이나 설득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이나 시점임을 잘 알기에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저마다 가치 실현 방법이나 수단은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를 실현하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다.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무심히 보내다가도 문득문득 그 가치에 대해 떠올릴 때면 생각지도 못했던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아쉬움이 함께 찾아올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 나 자신을 토닥이며 '잘하고 있다'는 한마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날 이해하고, 위로할 때 삶의 가치는 조금 더 높아질 테니까. 내일도 자신의 가치 실현을 위해 원하는 혹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보다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내일이면 그래도 오늘 하루쯤은 더 없는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삶의 가치를 얻기 위해 머물렀던 곳, 그렇게 긴 시간을 다녔던 회사를 떠난다. 내 회사 동료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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