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변호사(3)

벼랑 끝 변론

by 추억바라기

겨울 아침은 도시의 심장까지 얼려버릴 듯 매서운 칼바람으로 시작되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탁한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었고, 출근길 검은 물결을 이룬 인파가 좁은 계단 틈으로 서로의 어깨를 구겨 넣으며, 지하 세계의 깊은 곳으로 쏟아져 내렸다. 표정 없는 얼굴들이 빽빽하게 밀려가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민수는 그 흐름에 섞이지 못하고 자꾸만 사람들의 어깨에 부딪혔다. 누군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밀치고 지나갔지만, 민수는 항의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앞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겁먹은 다리는 자꾸만 제자리에 멈춰 서다 가다를 반복했다.

재민은 그런 민수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걸음을 맞췄다. 스스로에게도 낯선 감각이었다. '법무법인 태산'의 파트너 변호사로 살던 시절, 그의 세계에서 의뢰인은 '구해야 할 사람'이 아닌 '처리해야 할 사건'이었다. 그들의 눈물은 승소 전략을 짜는 데 필요한 데이터일 뿐 공감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민수의 닳아빠진 운동화 끈을 내려다보며 법원으로 향하는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재민은 더 이상 변호사 배지를 단 법조인이 아니었다. 그저 벼랑 끝에 선 한 사람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는 또 다른 인간일 뿐이었다.

법원 종합민원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회생·파산 상담 창구는 아침 9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북새통이었다. 대기석 의자는 이미 만석이었고, 복도까지 꼬리를 물고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고, 누군가는 체념한 듯 벽에 기대어 흐느꼈다. 모두가 '빚'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끌려온 죄수들 같았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상담 창구 너머에서 들려온 직원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불행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 특유의 무감각함이 묻어있었다.

민수는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누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꼬깃꼬깃 구겨진 대출 계약서 몇 장과, 붉은 글씨가 선명한 독촉장 뭉치가 들어 있었다. 직원은 익숙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서류를 훑었다. '타닥', '타닥'. 계산기 소리가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망치 소리처럼 날카롭게 들렸다.

"원금 합계 8천3백, 연체 이자까지 합치면 대략 1억 2천 정도 되네요. 현재 월 소득은 어떻게 되시죠?"

민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편의점 알바랑 물류 센터 일용직 합쳐서, 175만 원 정도요."

"후우."

직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안경을 고쳐 썼다.

"선생님,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최저생계비 1인 가구 기준 143만 원 제외하면 가용 소득이 30만 원이 조금 넘는데 이걸로 개인회생 신청하면 60개월 동안 갚아도 원금의 20%도 못 갚아요. 법원에서 인가해 줄 가능성 희박합니다. 실제 이 소득으로 생활비 쓰고 나면 빚 갚을 돈 없잖아요? 회생보다는 파산 쪽으로 가닥 잡는 게 현실적이에요."

민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파… 파산이요?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신용불량자 되고, 취직도 못 하고… 그냥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하실 건 아니고요. 면책받으면 빚은 탕감되지만, 5년 동안 금융 거래 제한되고 공무원이나 일부 자격증 취득에 제한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선택은 본인 몫이에요. 저희는 법적으로 가능한 절차만 안내해 드리는 겁니다."

직원은 피곤한 듯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사람 기다리니 빨리 결정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재민은 그 대화를 듣는 내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변호사 시절 수없이 목격했던 장면이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지만, 그 법의 문턱을 넘는 기술은 돈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복잡한 서류와 어렵고, 복잡한 용어 앞에서 무력하게 무릎 꿇어야 했다.

"잠깐만요."

재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직원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보호자분이세요?"

"아뇨, 법률 대리인 자격으로 왔습니다. 혹시 지금 계산하신 채무액에 불법 고금리 사채 내역도 포함된 겁니까?"

직원의 눈썹이 꿈틀 했다.

"불법 사채요?"

"이자제한법상 최고 금리는 연 20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류 보니까 일수 찍은 내역이 있던데, 이거 연리로 환산하면 400프로가 넘습니다. 민수야, 너 일수 쓸 때 계약서 썼어? 선이자 떼고 줬지?"

민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수술비가 급해서… 계약서 같은 건 안 썼고, 그냥 현금으로 300만 원 빌렸는데 일주일 뒤에 500만 원 갚으라고…."

"거 봐요. 원금 300에 일주일 이자 200이면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건 갚을 의무가 없는 부당이득입니다. 채무액 산정에서 제외해야죠."

직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펜을 돌렸다.

"선생님 말씀은 알겠는데요, 증거가 없잖아요. 사채업자들 현금 거래해서 기록 안 남기는 거 아시면서. 입증 못 하면 법원에서도 채무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증거 있습니다."

재민은 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녹음기 목록을 보여주며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확보한 통화 녹취, 협박 문자, 그리고 계좌 이체 내역 일부까지 정리해 뒀습니다. 특히 '가족들 찾아가서 죽여버리겠다'는 문자, 이건 채권추심법 위반인 거 아시죠? 불법 원인 급여 소송 진행하고, 대부업 법 위반까지 엮어서 형사 고소까지 같이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파산 신청할 때 이 부분 채권자 목록에서 소명자료로 첨부해 주십시오."

재민의 태도는 단호했고, 빈틈없이 정확한 법리 해석은 직원의 기세를 단번에 꺾었다. 직원은 그제야 재민을 다시 보았다. 단순한 보호자가 아님을 직감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그러시면 얘기가 다르죠. 자료가 확실하다면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이랑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도 같이 진행해 볼 수 있겠네요. 절차가 좀 복잡하고 길어지겠지만,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민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낭떠러지였는데, 갑자기 밧줄 하나가 내려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찰나의 희망은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 앞에서 힘을 잃었다.

"그… 근데요 변호사님. 법으로 하면 시간 오래 걸리잖아요. 그동안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어제도 고시원 앞까지 찾아왔는데… 게다가 최근엔 제 동생 학교 앞에도 나타났다고요…."

그 말에 재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동생 학교 앞이라고?"

"네… 동생이 무서워서 어젠 학교도 못 갔어요. 저 때문에… 저 하나 죽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가족들까지 괴롭히니까…."

민수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재민의 안에서 서늘한 분노가 일렁였다. 채무자를 압박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로 삼는 것. 가장 비열하고 악질적인 방식이었다. 과거 재민이 변호했던 거대 기업들도 하청 업체를 쥐어짤 때 비슷한 방식을 썼었다. 그때 자신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폭력을 '정당한 권리 행사'라 포장해 주었다. 역겨움에 속이 메슥거렸다.

"좋아."

재민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류 작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일단 그놈들부터 처리하자. 빚 갚는 것보다, 지금 당장은 민수 너희 가족들 안전을 지키는 게 먼저지."

상담을 마치고 법원을 나선 두 사람은 곧장 민수가 지내는 고시원 동네로 향했다. 오래된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 대낮인데도 볕이 들지 않아 음습한 기운이 감돌았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였다. 검은 패딩 점퍼를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꽁초가 수북했다. 그들은 민수가 나타나자마자 킬킬거리며 험악한 미소를 지었다.

"오, 장민수! 여기 있었네? 어제 전화 씹더니 배짱 좋다? 어디 야반도주라도 하려고 했냐?"

민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체처럼 하얗게 질렸다.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덜덜 떠는 민수의 앞을 재민이 막아섰다.

"당신들이야? 대부업체 직원?"

사내 중 하나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재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야, 이 샌님은? 형씨는 뭔데 남의 영업을 방해해? 꺼지셔!."

재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영업? 사람 협박하고 가족 스토킹하는 게 영업이냐?"

"이 새끼가 말이 짧네? 확 그냥…."

사내가 주먹을 쥐고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재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내 의뢰인한테 손대지 마. 나는 이 사람 법률 대리인이다."

"뭐? 법률 대리인? 푸하하하!"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박장대소했다. 골목이 떠나갈 듯한 비웃음이었다.

"야, 들었냐? 법률 대리인이랜다. 어이, 변호사 양반. 법대로 해봐, 법대로. 우리가 뭐 꿀릴 거 있는 줄 알아? 차용증 다 있고, 돈 빌려 간 건 팩트인데 네가 뭘 어쩔 건데? 어차피 이 새끼 돈 못 갚으면 콩밥 먹는 건 똑같아."

"그래, 돈 못 갚은 건 민사 문제지. 하지만 당신들이 하는 짓은 형사상의 문제야. 알아?"

재민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 중인 화면을 그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지금 이 대화, 그리고 어제 민수한테 보낸 협박 문자, 학교 앞에서 서성거리는 CCTV 영상까지. 전부 증거로 확보했어.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위반, 협박죄, 주거침입죄, 스토킹 처벌법 위반. 이것만 해도 징역 3년 이상 나올걸?"

사내들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법 조항을 줄줄 읊는 재민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사내 하나가 민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장민수. 머리 좀 썼네? 근데 법대로 하면 네 동생만 피곤해질 텐데. 학교 정문에 지 오빠가 빚쟁이라고 대자보라도 붙어야 정신 차릴래?"

사내는 낄낄거리며 민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애들 입소문 무서운 거 알지? 빚쟁이 동생이라고 소문나면 학교 꼴 참 재밌어지겠어. 왕따 당해서 학교 못 다니게 되면 다 네 책임… 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휘청거렸다. 재민이 순식간에 사내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인 것이다. 그 순간 얌전해 보이던 재민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입 닥쳐, 당신."

재민의 손아귀 힘은 엄청났다. 숨이 막힌 사내가 컥컥거렸다.

"가족 건드리면 그땐 변호사가 아니라, 내가 직접 너희들 죽여버린다. 법정 가기 전에 내 손에 끝날 줄 알아."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재민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살기마저 서려 있었다. 멱살을 틀어쥔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터질 듯 불거져 나왔다. 1년 전, 누군가의 손을 놓쳐버렸던 그 손은, 이번에는 뼈가 으스러지더라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상대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기에 눌린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재민의 손을 뿌리쳤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미친놈이네 이거…."

그들은 씩씩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두고 보자. 빚은 빚이야.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받아낼 거니까 각오해."

악담을 퍼부으며 사내들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민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윽… 이제 진짜 끝났어요. 저 놈들 악질이에요. 변호사님까지 해코지하면 어떡하시려고…."

재민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민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겁먹지 마."

"하지만…."

"민수야. 넌 혼자가 아니야. 이제 네 옆엔 내가 있어. 저런 양아치들, 내가 수백 명도 더 상대해 봤어. 나 최재민, 법으로도, 깡으로도 절대 안 진다."

민수는 떨리는 손으로 재민의 손을 맞잡았다. 재민의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민수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은 더 이상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든든함, 그리고 안도감이었다.

그날 밤. 재민은 고시원 한 평 남짓한 자신의 방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 불빛 아래, 민수가 건네준 자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악랄한 문자 메시지, 불법 사채 내역, 차용증, 통화 녹취 파일.

재민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하게 차올랐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민수, 그리고 그의 가족들… 이번엔 반드시 지켜낼 거야.'

로펌의 화려한 대리석 회의실, 수천만 원짜리 수임료, 승소 파티의 샴페인. 과거의 영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오늘 좁은 골목길에서 민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던 그 순간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때의 승리는 약자를 밟고 선 승리였지만, 지금의 싸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매서운 겨울바람이 창틀을 덜컹거리고 있었다. 골목 저편,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은 마치 거대한 입을 벌린 짐승의 굴 같았다. 재민은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외투 깃을 세우고, 운동화 끈을 다시 꽉 조여 맸다. "가자." 그의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뚜벅뚜벅 파고들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