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의 서막
밤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골목은 더욱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고시원 쪽방 창문 틈새로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들이닥쳤다. 보일러조차 돌지 않는 냉골 바닥, 민수는 얇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빚 독촉 전화의 잔상이 귓가에서 이명처럼 윙윙거렸다. 낮에 법원에서 들었던 상담 직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도 환청처럼 떠다녔다.
'파산… 회생….'
민수는 웅크린 채 자신을 자책했다.
"다 내 잘못이야. 애초에 빌리는 게 아니었는데…."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방바닥에는 구겨진 독촉장과 붉은 압류 딱지가 붙은 고지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치 그 종이조각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민수의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너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민수는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제 골목에서 들었던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족 건드리면 그땐 변호사가 아니라, 내가 직접 너희들 죽여버린다.’
재민이 형. 지금껏 빚쟁이들에게는 욕설과 조롱만 들었고, 친구들은 돈 빌려달라는 소리가 무서워 연락해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동생조차 원망 섞인 한숨만 내쉬었었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남자가 자신을 위해 대신 화를 내고, 싸워주겠다고 했다.
민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벼랑 끝에서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명치끝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께를 꾹 눌렀다. 마치 멈춰 섰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는 사람처럼.
한편, 같은 시각 재민의 고시원 방.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에는 노트북과 민수에게서 받은 자료들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었다. 재민은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엑셀로 정리된 민수의 채무 내역과 통화 녹취 파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전직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로서의 감각이 깨어났다. 재민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건의 구조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개인 사채업자가 아니다.'
재민은 확신했다. 어제 골목에서 마주친 놈들의 태도, 협박의 수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민수 외에도 수많은 피해자가 얽혀 있는 정황. 그것은 조직적인 범죄였다.
'이자제한법 위반은 기본이고, 채권추심법 위반, 정보통신망법 위반, 거기에 조직폭력배 개입 정황까지…. 이건 단순 민사 소송으로 끝낼 게 아니라 형사 사건으로 비화시켜서 뿌리째 뽑아야 한다.'
재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 그는 이런 사건에서 주로 가해자 측, 즉 대부 업체나 기업의 변호를 맡아왔다. '법대로 하시죠'라며 피해자들을 조롱하던 그들의 논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법망을 피해 가는 교묘한 수법들, 경찰 수사를 무력화하는 로비 방식까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그 '더러운 경험'들이 지금 민수를 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재민은 이제 적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야. 이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죄가 아니야."
재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1년 전, 지하철 선로 위로 사라진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키지 못했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재민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용증명 발송',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소장 작성', '형사 고소장 초안'.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고요한 밤을 갈랐다.
다음 날 저녁. 재민은 민수를 지하철역 근처 허름한 분식집으로 불러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과 떡볶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민수는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듯 허겁지겁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느껴지는 포만감과는 달리 표정은 여전히 그늘져 있었다.
"형… 근데 진짜 괜찮을까요?"
민수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사람들 눈빛 봤잖아요. 그냥 양아치들이 아니에요. 동생 학교까지 찾아온 거 보면… 저 때문에 형까지 위험해질까 봐 너무 무서워요."
재민은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서운 게 당연해. 안 무서우면 그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민수야, 그 녀석들, 도망치면 널 더 만만하게 보고 끝까지 괴롭힐 게 뻔해. 놈들은 네가 겁먹었는지 아닌지 귀신같이 알거든. 차라리 눈 똑바로 뜨고 버텨. 그래야 함부로 못 덤벼."
"하지만…."
"너 혼자였다면 도망치는 게 맞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나도 있잖아. 그리고 난 놈들보다 더 독한 놈들도 많이 상대해 봤어."
재민은 씨익 웃어 보였다.
"걱정 마. 내가 말했잖아. 주먹은 사람을 때려눕히지만, 법은 사람을 발가벗겨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거든. 놈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생채기나 멍이 드는 게 아니라, 누리고 가지고 있는 걸 뺏기는 거야.”
그 말에 민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막연한 두려움 속에 작은 용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나도… 싸울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며칠 뒤, 예상대로 놈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민수의 고시원 건물 앞에 낯선 검은 승합차 한 대가 며칠째 주차되어 있었다. 짙은 선팅 때문에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는 건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띠링- 띠링-'
민수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려 댔다. 발신자 제한 번호였다.
‘야, 장민수. 변호사 믿고 까부는 거냐? 오늘 안에 입금 안 하면 네 동생 하굣길 우리가 마중 나간다. 밤길 조심해라. 변호사도 너 평생 못 지켜준다.’
협박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민수는 공포에 질려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때, 고시원 방문이 쾅쾅 울렸다.
"야!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어!"
놈들이었다. 기어이 고시원 안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민수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몇 번이나 번호를 잘못 눌렀다.
"혀, 형…! 그, 그 사람들이… 문 앞에…!"
"가만히 있어! 문 절대 열어주지 말고! 지금 바로 갈게!"
재민은 전화를 끊자마자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낚아채듯 걸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신발 뒤축을 구겨 신은 채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와, 어둠이 깔린 골목길로 몸을 던졌다.
민수가 지내는 고시원은 재민의 숙소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낡은 상가 건물이었다. 평소라면 5분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지금 재민에게는 그 짧은 거리가 천 리 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시야가 뿌옇게 번졌지만, 재민은 거친 숨을 삼키며 발을 내디뎠다. 민수의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계단을 전력으로 뛰어 올라갔다.
3층 복도에 들어서자, 좁은 통로 끝에서 위압적인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문 열어! 확 뜯어버리기 전에!"
"그만해!"
재민의 고함에 사내들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며칠 전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놈들이었다.
"아, 변호사 양반 또 오셨네? 아주 제집처럼 드나드시네?"
리더 격인 사내가 껌을 짝짝 씹으며 비아냥거렸다.
"아주 동네방네 광고를 해라. 지금 니들이 하는 짓, 명백한 주거침입인 거 몰라? 경찰 오기 전에 당장 사라져."
"주거침입? 하이고, 무서워라. 우린 정당하게 빚 받으러 온 채권자야. 채권자가 채무자 만나는 게 죄냐?"
"절차 무시하고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 명백한 불법 추심이야. 여기서 바로 수갑 차고 싶어? 지금 경찰 부를 테니까 계속해 봐."
재민이 휴대폰을 꺼내 들자, 사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재민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야, 변호사면 다야? 우리가 누군지 알고 까불어?"
재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차갑게, 아주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희가 누구든 상관없어. 내 눈엔 그저 범죄자일 뿐이니까. 그리고 경고하는데, 내 몸에 손대는 순간 특수폭행이랑 업무방해까지 추가될 거다. 합의? 꿈도 꾸지 마."
재민의 기세에 눌린 사내는 흠칫하며 손을 뺐다. 말뿐인 허세가 아니었다. 사내는 씩씩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좋아... 오늘은 봐준다. 근데 변호사 양반, 착각하지 마."
사내는 재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비릿하게 웃었다.
"법대로? 좋지. 근데 그거 아나? 고소장 넣고, 조사받고, 재판까지 가는 데 최소 6개월은 걸려. 근데 빚 독촉은 우리가 매일 할 거야. 법원 판결문 나올 때쯤이면, 저 새끼랑 저 새끼 가족들 멘탈은 이미 가루가 돼 있을걸?"
사내의 시선이 재민의 목소리에 문을 열고 나온 민수를 향해 뱀처럼 음흉하고, 차갑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 샌님이 언제까지고 네 옆에 붙어 있을 것 같아? 이 양반 집에 가고 나면, 우린 다시 와. 우린 시간이 아주 많거든. 경찰? 우린 경찰 빽 없는 줄 알아?"
"걱정해 줘서 고맙네. 근데 그 1년 걸린다는 재판, 내일 당장 유치장에서 받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해.”
사내들은 재민을 노려보며 침을 퉤 뱉고는 돌아섰다.
"두고 봐. 네 놈들 둘 다 조만간 곡소리 나게 해 줄 테니까."
놈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민수는 얼굴을 들어 재민을 봤다. 민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민수를 재민이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형… 저 사람들 말대로 경찰도 한패면 어떡해요? 우리 진짜 끝장나는 거 아니에요?"
재민은 민수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아니. 경찰이 한패면 검찰로 가고, 검찰도 안 되면 언론으로 갈 거야. 대한민국에 놈들 편만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우리가 한방 날릴 차례야."
재민은 말을 마치고 찌그러진 민수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발로 찬 탓에 잠금장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곳에 민수를 혼자 두고 가는 건 위험했다.
"짐 챙겨. 일단 나가자."
"네? 어딜요?"
"내 방으로 가. 놈들이 한 번 고시원에 들어온 이상 여긴 안전하지 않아. 오늘은 내 방 가서 자고 내일 날 밝는 대로 대책을 좀 세워보자."
두 사람은 쫓기듯 고시원을 빠져나와 재민의 숙소로 향했다. 두 블록 떨어진 재민의 고시원은 옥탑방이라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눈에 덜 띄었다.
재민의 방에 도착해서야 두 사람은 긴 숨을 내쉬었다. 재민은 책상 서랍을 열어 그동안 밤새 준비해 둔 서류 뭉치를 꺼내 민수 앞에 펼쳐 보였다.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소장’, ‘채권추심 금지 가처분 신청서’, 그리고 경찰에 제출할 두툼한 ‘고소장’.
"민수야, 이거 봐. 이게 우리의 무기야. 놈들이 주먹을 쓸 때 우린 이걸로 놈들의 목줄을 죄는 거야."
재민은 민수와 함께 작성한 고소장을 꼼꼼히 검토했다. 민수가 모아둔 협박 문자, 통화 녹취, 그리고 오늘 주거침입 상황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이 업체, 뒤를 좀 캐봤어. '일진 파이낸스'라고 되어 있는데 실소유주는 지역 조폭 '쌍칼파'랑 연관돼 있더라. 너 말고도 피해자가 수십 명이야. 할머니, 외국인 노동자, 대학생들까지… 악질 중의 악질이지."
민수는 놀란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봤다.
"조폭이요…? 그럼 진짜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위험하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놈들도 잃을 게 많다는 뜻이야.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거든. 우린 그 꼬리를 잡고 흔들어서 몸통까지 끌어낼 거야."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관할 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을 찾았다. 담당 형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 속에서 귀찮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고소장이요? 아, 요즘 이런 사건 너무 많아서 수사 착수하는 데만 한 달 넘게 걸려요. 증거가 애매하면 무혐의 나올 수도 있고…."
형사는 대충 훑어보고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으려 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재민은 침착하게 명함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반장님,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녹취, 문자, CCTV, 계좌 내역까지 다 정리해서 첨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단순 대부업법 위반이 아니라 조직폭력배 자금줄 수사로 확대될 사안입니다."
형사가 명함을 흘긋 보더니 눈이 커졌다. '법무법인 태산 파트너 변호사(전)'.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자신을 찾아온 명함의 주인이었다. 형사의 태도가 순식간에 공손해졌다.
"아… 변호사님이 직접 오셨습니까? 이게 조폭 연루 사건이라고요?"
"네. 제가 직접 조사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수사가 미적거리는 것 같으면, 제가 아는 기자들한테 자료 넘겨서 언론에 풀 생각입니다. '경찰이 조폭 봐주기 수사한다'는 기사 나가면 곤란하시겠죠?"
재민의 부드러운 협박에 형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당연히 철저하게 수사해야죠. 바로 접수하겠습니다."
경찰서를 나서는 길, 민수는 멍한 표정으로 재민을 올려다봤다.
"형… 진짜 대단해요. 형사가 꼼짝도 못 하던데요?"
"에이-, 뭘? 이게 법의 힘이야.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제대로 알고 준비해서 휘두르면 놈들도 꼼짝 못 해."
민수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포기하려 했던 세상,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목소리.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온몸을 던져 함께 싸워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법률 지원을 넘어선, 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위로였다.
민수는 멈춰 서서 재민의 팔을 붙잡았다.
"형."
재민이 돌아보았다. 민수의 눈빛은 더 이상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려던 도망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저도 싸우고 싶어요. 무섭다고 숨지 않을래요. 제 동생, 그리고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형 옆에서 끝까지 돕고 싶어요."
재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 넌 피해자가 아니라, 내 파트너다. 우린 한 팀이야."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이제 반격의 서막이 올랐다. 민수라는 작은 불씨가 재민이라는 바람을 만나, 거대한 불길이 되어 악의 뿌리를 태워버릴 준비를 마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