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대의 작은 자존감
긴 연휴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추석 전에 구매한 자전거를 게시할 생각을 하고,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새로 구매한 자전거는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접이식이라 접힌 부분을 펴야 하는데 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아내는 제대로 알아보고 산거냐고 조금씩 잔소리를 시작했다. 아내 말을 듣지 않은 나였기에 '아닌 척', '괜찮은 척' 하는 게 최선이었다. '처음 끌고 나가는 거라 서툴러서 그렇다'라고 아내에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전거를 타면서 더욱 불거졌다.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고 페달을 젖는 순간 올려놓은 안장이 아래로 쑤욱- 수직하강하며 내려갔다. 작은 사이즈 바퀴를 선호해서 안 그래도 작아 보이던 자전거가 안장까지 내려앉았더니 어린이용 자전거처럼 작아져 버렸다. 덩달아 아내의 한숨과 잔소리는 더 커졌다.
"아니 조금 싸게 주고 사면 뭐해요. 그럴 거면 제 값 주고 제대로 된 걸 사는 게 낫죠. 싼 게 비지떡이라잖아요."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의 뜻은 '비용을 적게 들여 얻은 것은 가치나 품질이 떨어지기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2024년 국내 MZ세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이 속담을 뒤집는 새로운 소비 태도를 보이는 문화가 생겨났다. 고가의 브랜드, 명품 등을 과시하는 것보다 실용과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비 계획을 당당히 드러내는 '라우드 버짓팅(Loud Budgeting)'이 그 대표적인 예다. 라우드 버짓팅이란 Loud의 당당하게 와 Budgeting의 예산관리, 수립 등의 단어가 합쳐져 말 그대로 자신이 돈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소비 습관을 말한다. 작년 초 글로벌 MZ세대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져 작년 하반기부터 국내 MZ세대의 소비패턴, 태도로 SNS상에서 유행했던 새로운 소비 개념이다. 최근 조금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MZ세대 사이에서 이 소비 개념은 꾸준히 그들의 문화로 유지되고 있다.
절약이 '힙'이 되는 시대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욜로(YOLO)’와 ‘플렉스(Flex)’가 세대를 대표하는 키워드처럼 쓰였던 적이 있다. 소비는 자기표현의 수단처럼 여겨졌고, 트렌드처럼 무섭게 번져나갔다. 하지만 2024년부터 체감하는 공기가 달라졌다. 물가와 금리가 꾸준히 오르고, 경기회복은 된다고 하지만 직접 체감이 가능한 지표는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오르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월급봉투는 한 없이 가볍다. 모든 지표가 오르는 통에 먹거리, 입을 거리 등 생필품이 모두 두 자릿수의 상승세를 보인 지 오래다. 직장인들 점심값 소비에 대한 인식과 절제는 선택이 아닌 생존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작년부터 국내에서 유행하는 소비 트렌드 키워드들을 보면 '요노(YONO)'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You Only Need One'의 줄임말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절약형 라이프스타일을 지칭한다.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보이기 위한 소비보다 자신이 만족하는 실용 소비를 선호한다는 응답이 89.7%에 달한다는 설문 결과도 있다. 또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는 '고정비 최소화와 라우드 버짓팅'이 고물가, 고금리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떠올랐다고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20, 30대의 통신비의 금액변화가 두드러진다. 2019년 대비 2023년 통신비가 20대는 29.2%, 30대는 32.8%가 감소했다.
최근 Z세대의 '라우드 버짓팅' 현상이 두드러지며, 관련 소셜미디어 언급량은 2021년 1월과 비교해 2023년 2월 기준 약 2.1배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런 데이터를 보면, 절약은 단순히 돈을 아끼는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문화의 지표로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걸까? 우선 불확실한 경제현실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고물가, 고금리, 취업난 등이 반복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내일을 위한 소비 관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뚜렷해졌고, 이런 인식들이 공유되어 MZ세대들의 소비태도 또한 바뀌었다. 과거엔 과시적 소비가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절약하는 태도가 오히려 하나의 자기표현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소비문화는 가성비 높은 저가 제품의 구매를 넘어 자신만의 소비취향을 공유하는 놀이 문화로 진화 중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환경 이슈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지속 가능성은 환경과 직결된다. 이런 이유로 충동적 구매나 사용하지 않는 제품의 낭비적 소비를 줄이고, 한 번 살 제품은 오래 쓰는 것으로 사는 것이 옳은 소비 패턴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소비 콘텐츠, 소비습관이 SNS,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런 소비 행위가 단순히 개인만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유 가능한 콘텐츠라는 인식이 커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최근 SNS를 보다 보면 '득템'과 같은 단어들의 사용 용도, 조건이 바뀌고 있다. 과거 '득템'은 한정판 고가 가방, 신상 등을 자랑할 때 자주 사용하던 단어였다. 최근엔 다이소에서 몇 천 원을 주고 사서 진짜 '득템'했다는 용어를 더 자주 쓰곤 한다. 그 단어 속에는 실속을 챙겼다는 뿌듯함과 스스로의 주머니를 지켰다는 안도감의 의미로 함께 쓰인다.
MZ세대의 변화된 소비패턴, 트렌드에는 그들만의 철학이 느껴진다. 그들은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품질이면 괜찮아'라는 태도로 작은 소비에도 당당히 드러내는 자기표현의 방식을 가져갈 것이다. 절약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는 세대만의 정서가 담겨있지 싶다. 우리는 지금 절약을 생존이 아닌 미학으로 배우는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 비지떡일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가장 솔직한 표현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전거 구매도 인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소비 선택에 대한 불안과 자책, 사회적 압박으로 생겨난 자연스러운 소비 습관에서 발생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품질까지 좋았다면 잘 샀다는 결과를 얻었겠지만 유사한 소비패턴을 앞으로도 바꾸진 않을 듯하다. 비싸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고, 싸다고 무조건 낮은 가치와 품질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앞으로는 내 소비에도 정확한 계획을 세우고, 품질과 안정성에 대한 판단 기준도 높일 생각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면, 그 비지떡이 되지 않도록 '가성비'와 '품질 안정성'의 균형을 고민하는 소비자가 되겠다. 아쉽지만 내 비지떡(?) 자전거는 조이고, 닦아서 잘 타야지 뾰족한 대안은 없을 듯하다.
그나저나 우리 딸아이도 MZ세대인데 딸아이 통장 잔고만 보면 꼭 모든 MZ들이 트렌드를 따르는 건 아닌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