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뛰어! 뒤돌아보지 마!"
재민의 외침과 동시에 세 사람은 신도림역의 인파 속으로 몸을 던졌다.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지하철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북적임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일한 방패였다.
"비켜요! 좀 비킵시다!" 민수가 앞장서서 인파를 헤치며 길을 텄다. 그의 등 뒤로 김소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따랐고, 재민이 그 뒤를 지키며 힐끔힐끔 후방을 주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셋이 개찰구를 뛰어넘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놈들은 거칠게 사람들을 밀치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귀에는 인이어 이어폰을 꽂은 채였다.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2번 승강장! 지금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야 해!" 재민이 소리쳤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자, 스크린도어 너머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띵- 띵- 띵-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내 방송과 함께 열차 문이 열렸다. 열차 속에 끼어있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타! 무조건 타야 해. 밀고 들어가!" 민수가 김소연을 열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재민이 마지막으로 몸을 실으려는 찰나, 사내들 중 앞에 쫓아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재민을 발견하자마자 계단 난간을 뛰어넘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거기 서! 야-!!"
‘출입문 닫습니다.’ 치익-.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도어와 열차 문이 동시에 닫히기 시작했다. 사내가 손을 뻗었지만, 닫히는 문틈 사이로 손이 닿지는 않았다. 덜컹. 열차가 출발했다. 유리창 너머로 분에 못 이겨 문을 발로 차는 사내의 모습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하아... 하아...." 열차 안, 세 사람은 문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김소연의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으려 하자, 민수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없습니까?" 김소연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긴장과 공포로 인해 그녀의 몸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재민은 주변을 살폈다. 승객들이 힐끔거렸지만, 그런 관심도 잠시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민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놈들은 이미 CCTV를 보고 우리의 인상 착의를 파악했을 거야. 다음 역, 아니면 다다음 역에 미리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어.'
"형님, 이제 어디로 갑니까? 놈들이 쫙 깔렸을 텐데." 민수의 물음에 재민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은 10만 원 남짓. 카드를 쓰는 순간 위치가 노출된다.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내린다." "거긴 왜요?" "거기에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어. 예전에 파산 사건 처리하다가 알게 된 곳인데, 명의가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가산디지털단지의 한 낡은 오피스텔.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복도 전등은 깜빡거렸고, 바닥에는 흙먼지로 발자국이 새겨진 전단지가 굴러다녔다. 재민이 복도 끝에 있는 철문 앞에 서서 번호키를 눌렀다.
'삑- 삑- 삑- 삑-. 띠리릭.'
문이 열리자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오랫동안 비워둔 사무실이었다. 낡은 책상 두 개와 소파 하나, 그리고 구석에 쌓인 서류 박스들이 전부였다. 창문에는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밖으로 빛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었다.
"으... 여기 귀신 나오겠는데요." 민수가 몸을 부르르 떨며 벽을 더듬더니 전등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이 여러 번 깜박거리며 겨우 불을 밝혔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빚쟁이랑 용역 깡패야. 일단 앉아요."
재민은 김소연을 소파에 앉히고, 구석에 있던 생수병을 확인했다. 다행히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진정하고, 일단 물부터 마셔요." 김소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품속에서 USB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색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 저 안에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대한민국 상위 1%의 추악한 민낯을 무너뜨릴 폭탄이 들어있었다.
"확인해 보죠." 재민은 가방에서 낡은 노트북을 꺼냈다. 전원을 켜고 USB를 꽂았다. 화면에 폴더가 떴다. ‘231001_H.avi’, ‘Ledger.xlsx’, ‘VIP_List.hwp’.
재민은 먼저 ‘231001_H.avi’ 파일을 클릭했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호텔 스위트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김소연의 모습이 보였고, 그 위로 낄낄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년 진짜 뻗었네? 약발 죽이는데?' 카메라가 돌아가며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박수현이었다.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입가에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누가 봐도 마약 투약 상태였다.
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민수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저런 짐승만도 못한 새끼가...." 김소연은 귀를 막고 웅크렸다. 재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영상을 끝까지 확인했다. 감정을 배제해야 했고,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라, 놈의 숨통을 끊을 송곳을 찾아야 할 때였다.
재민은 영상을 끄고 다음 파일을 열었다. 엑셀 파일이 열리자 수백 개의 이름과 숫자가 화면을 메웠다. '강남서 김 OO 과장 - 500', '서울지검 박 OO 검사 - 룸살롱 접대', '국토부 이 OO 국장 - 골프 회원권'.
"하... 이거 진짜 핵폭탄이네." 재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단순한 성범죄가 아니었다. 박수현과 JS 홀딩스는 이 나라의 법조계, 정계, 경찰을 돈과 향응으로 사육하고 있었다. 놈들이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이유, 경찰 신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형님, 이 정도면 그냥 인터넷에 뿌려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놈들 다 끝장나는 거잖아요." 민수가 흥분해서 말했다. 하지만 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뿌리는 순간 소연 씨는 정말 사라질지도 몰라.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지도..."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인터넷? 놈들은 포털 사이트 검색어 지우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거야. 영상이 올라가는 즉시 삭제될 거고, 오히려 소연 씨를 '꽃뱀'이나 '마약 중독자'로 몰아서 역공작을 펼칠 거야. 이 장부도 조작된 거라고 우기면 그만이고."
재민은 노트북을 덮으며 김소연을 바라봤다. "소연 씨. 이 싸움, 생각보다 길고, 위험해질 겁니다. 놈들은 소연 씨의 과거부터 가족관계까지 전부 털어서 난도질할 거예요. 견딜 수 있겠습니까?" 김소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은 말라 있었다. "잃을 것도 없어요. 이미 제 영혼은 그날 죽었으니까요. 그놈이 웃으면서 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나아요."
"같이 죽을 필요 없습니다. 놈만 매장시키면 돼요." 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말라비틀어진 보드마카를 집어 들고 칠판에 크게 세 글자를 썼다. '박 수 현'
"우리의 목표는 박수현을 법정에 세우는 겁니다. 하지만 경찰이나 검찰로 바로 가져가면 중간에 가로채기 당하거나 묵살당할 확률이 100%입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재민이 칠판에 또 다른 이름을 썼다. '강 동 철'
"이놈부터 잡아야 해. JS 홀딩스의 해결사. 박수현의 더러운 짓을 도맡아 처리하고, 뒤처리를 해온 놈. 이 장부의 실무자." 재민의 눈이 번뜩였다. "강동철을 잡아서 박수현의 목을 칠 증인이 되게 만들어야 해. 박수현은 강동철을 꼬리 자르기 할 거고, 강동철은 살기 위해 박수현을 물게 만들어야지."
"그 뱀 같은 놈을 어떻게 잡습니까? 깡패들을 군대처럼 데리고 다니던데." 민수의 걱정에 재민은 씨익 웃었다. "뱀은 굴 밖으로 나오게 해야 잡지. 놈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미끼를 던질 거야."
재민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주소록에서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 하나를 찾았다. '한겨레일보 사회부 최 기자'. 로펌 시절, 재민과 악연으로 얽혔던 기자였다. 재민이 기업 편을 들 때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비판 기사를 썼던 돈 안 먹는, 아니 돈이 안 먹히는 꼴통 기자.
"형님, 기자한테 제보하시게요?"
"어. 하지만 다 주는 건 아냐. '예고편'만 보여줄 거야. 놈들이 불안해서 미쳐 날뛰게."
다음 날 아침, JS 홀딩스 본사 펜트하우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집무실 안, 고가의 가구들이 박살 나 바닥에 부서져 있었다.
"야! 강동철! 너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박수현이 골프채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약 기운이 덜 깬 듯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동철 이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그의 뺨은 이미 박수현의 폭행에 당한 듯 붉게 부풀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최재민 그 변호사 놈이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는 바람에…."
"변호사? 그깟 떨거지 하나 처리 못 해서 USB를 뺏겨?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 장부 터지면 아버지랑 나, 아니 우리 회사 전체가 공중분해 된다고!" 박수현이 강동철의 멱살을 잡았다. 술 냄새와 약 냄새가 섞인 역한 숨결이 강동철의 얼굴에 닿았다. "당장 찾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 찾아오면… 네가 대신 들어가야 할 거야. 알지? 횡령, 배임, 마약… 네 이름으로 서류 다 만들어 놨으니까."
강동철의 눈썹이 꿈틀 했다. 토사구팽. 언젠가 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 그는 끓어오르는 모멸감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강동철이 집무실을 나가자, 박수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씨발… 김소연 그년,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집무실 밖으로 나온 강동철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의 눈빛이 독사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애들 다 집합시켜. 이번엔 연장 챙겨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최재민 변호사 뒤 좀 더 깊게 파 봐. 가족, 친구, 하다못해 키우던 개새끼까지. 약점 하나만 걸리면 돼. 그 새끼가 가장 아끼는 걸 인질로 잡아야 해."
같은 시각, 가산동 은신처. 재민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방금 전송된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 단독! 재벌 3세의 일탈? '약물 성폭행' 의혹 동영상 존재… 피해자 법적 대응 예고 -
기사는 구체적인 이름은 가린 채 'S 그룹 3세 P 씨'라는 이니셜로 나갔지만,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댓글 창이 뜨겁게 반응했다. 실시간으로 기사는 인터넷으로 퍼 날라졌고, 출처만 다를 뿐 같은 기사들로 인터넷 포탈은 도배됐다.
"형님, 기사 떴습니다! 반응 장난 아닌데요?" 민수가 스마트폰을 보며 환호했다. 하지만 재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놈들은 이 기사를 막으려고 포털에 압력을 넣을 거고, 동시에 우릴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겠지."
재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김소연을 바라봤다. "소연 씨. 이제 곧 경찰서에서 연락이 올 수도 있고, 기자들이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와도 접촉하지 마세요. 오직 저를 통해서만 말해야 합니다." 김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낡은 다이어리가 쥐여 있었다.
"그리고 민수야."
"예, 형님."
"지금부터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아이 참, 말씀만 하십쇼. 제가 또 위험한 건 전문 아닙니까."
재민은 민수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엔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여기가 강동철이 관리하는 비밀 창고야. 장부에 적힌 뇌물 현금들이 보관되는 곳이지. 오늘 밤, 놈들이 움직일 거야. 분명 현금을 옮기거나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겠지."
"가서 덮칩니까?"
"아니. 놈들이 물건을 옮기는 장면을 촬영해 와. 아주 선명하게. 그게 우리가 강동철을 잡을 덫이 될 거야."
민수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비장하게 웃었다. "파파라치 컷 한번 제대로 찍어오겠습니다."
민수가 나가고, 은신처에는 재민과 김소연 둘만 남았다. 낡은 사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재민은 창가로 다가가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냈다. 밖은 여전히 회색빛 도시였다. 저 수많은 빌딩 숲 어딘가에,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밟고, 이용하고 그리고 잡아먹는 포식자들이 웃고 있을 것이었다.
"변호사님." 김소연이 불렀다. "정말… 이길 수 있을까요?"
재민은 커튼을 다시 쳤다. 어둠이 방을 채웠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났다. "이긴다는 거창한 생각은 안 합니다. 다만, 놈들이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아주 비싸고 찝찝한 값을 치르게 만들 겁니다. 그게 약자가 강자를 괴롭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그리고…." 재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한 번 물면 절대 안 놓습니다. 그게 제가 배운 유일한 사냥법이니까요."
전쟁은 선포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재민은 다음 수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노트북 위로 손을 올렸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마치 총성처럼 적막한 방 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