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의 펜트하우스(1)

다시 길 위에서

by 추억바라기

서울의 겨울은 지독했다. 1월의 한파는 빌딩 숲 사이를 칼날처럼 파고들었고, 도심의 아스팔트는 얼어붙은 토사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강남의 대로변과 달리,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의 밤은 더 깊고, 더 차갑고, 더 어두웠다.

재민은 승강장 구석 벤치에 앉아 식어버린 캔커피를 만지작거렸다. ‘거리의 변호사’라는 낯간지러운 별명이 붙은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꽤 많은 사람을 만났다. 임금을 떼인 일용직 노동자,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가정주부,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대학생. 법의 문턱이 너무 높아 감히 넘볼 생각조차 못 하던 사람들에게 재민의 낡은 명함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매고 있던 그 줄이 무겁게 느껴졌다. "변호사 양반, 고맙수. 덕분에 밀린 월급은 받았는데… 사장 그놈이 나보고 도둑놈이라네. 허허." 방금 상담을 마친 김 씨 노인의 씁쓸한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돈은 받아냈지만, 상처받은 마음까지 법이 치유해 줄 수는 없었다. 재민은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옆자리가 허전했다. 지난달,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며 떠난 민수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귀찮게 따라다니며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저 사람은 눈빛이 영 아닌데요?"라고 떠들던 녀석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하하-. 보낼 때 쿨하게 보내놓고 촌스럽기는." 재민은 캔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요-, 아저씨! 잠깐만요!"

역무원실 쪽에서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재민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개찰구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 남성이 젊은 역무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내, 내가 누군지 알아? 어? 내가 왕년에… 윽!"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검은색 패딩 점퍼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사내였다. 사내는 능숙한 동작으로 취객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아저씨, 술 곱게 드셔야죠. 공공장소에서 행패 부리시면 업무방해죄가 추가됩니다. 아시죠?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 벌금."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등판. 그리고 저 어설프게 읊조리는 법률 용어. 재민의 눈이 커졌다. 취객을 역무원에게 인계하고 모자를 고쳐 쓰며 돌아서던 사내가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씩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형님, 그새 좀 수척해지셨네. 밥 잘 챙겨 드시라니까."

장민수였다.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짓겠다던 놈이, 새까맣게 탄 얼굴로 서울 한복판 지하철역에 서 있었다.


"너, 내려간 거 아냐? 아니, 언제 온 거야?" 역 근처 포장마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락국수 두 그릇을 사이에 두고 재민이 물었다. 황당했지만 입 밖으로 새 나오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반가움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민수는 쑥스러운 듯 코를 문질렀다.

"갔었죠. 가서 어머니 병원도 옮겨 드리고, 민지 전학 수속도 밟고… 근데 영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왜? 빚쟁이들도 없는데 발 뻗고 잤어야지.” “그게 말입니다…."

민수는 가락국수 국물을 들이켜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봤다.

"형님이 걱정돼서 못 살겠더라고요. 지난번에 그 JS홀딩스인가 뭔가 하는 놈, 그놈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잖습니까. 형님 혼자 놔두면 위험해질 거 뻔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민수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신문 조각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며칠 전 신문 사회면 기사였다.

법무법인 태산, 대기업 성폭행 무혐의 이끌어내… ‘유전무죄’ 논란

"시골에서 이걸 봤는데, 형님 생각이 더 나더라고요. 형님이 때려치운 그 로펌 회사 놈들, 아직도 저러고 사는데 형님 혼자 쪽방에서 컵라면 드시면서 싸우는 게… 너무 외로워 보여서요." 재민은 말문이 막혔다. 민수의 깊은 속내에 한 편으로 놀라기도 했지만, 어쩌면 자신만큼이나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다시 올라온 거야? 너희 가족들은 어쩌고."

"민지랑 엄마한테는 서울에 좋은 일자리 구했다고 뻥 쳤어. 월급 꼬박꼬박 보내주기로 했고요. 저, 이제 형님 사무장 할랍니다. 월급은 나중에 사건 크게 한탕 해결하면 그때 주십쇼."

"이- 미친놈. 여기가 무슨 탐정 사무소인 줄 아냐? 난 돈 안 되는 일만 해."

"압니다. 그러니까 제가 더 필요한 거죠. 형님은 머리 쓰고, 저는 몸 쓰고. 딱 좋잖아요?"

민수가 가락국수 그릇을 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재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든든했다. 지난번 사채업자 사건 때 보여준 민수의 끈기와 깡다구라면, 이 진흙탕 같은 거리에서 꽤 쓸만할 것이었다.

"좋아. 대신 후회하지 마라. 월급은 밀릴 수도 있고,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아이고, 사채업자들한테 시달린 짬밥이 있는데 그 정도야 뭐. 잘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님."

두 사람이 잔을 들어 소주잔을 부딪치려는 찰나였다. 포장마차 천막이 걷히며 찬 바람이 '훅-' 밀려 들어왔다. "죄송합니다만… 영업 끝났나요?"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 재민과 민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얇은 트렌치코트 차림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처럼 핏기 없이 하앴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 재민의 시선을 끈 건 그녀의 눈이었다. 초점이 없이 텅 빈, 하지만 그 깊은 곳에서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는 듯한 눈동자. 그것은 2년 전 재민이 놓쳤던 남자의 눈빛이자, 얼마 전 선로 위에서 민수가 보였던 눈빛이었다.

"아니요. 들어오세요. 자리 있습니다." 재민이 서둘러 자리를 만들었다. 여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와 구석 자리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가죽 다이어리 하나가 생명줄처럼 들려 있었다.

민수가 재빠르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떠다 주었다. "저기, 좀 드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여자는 물 잔을 쥐고도 마시지 못했다. 컵을 쥔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테이블과 잡은 컵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민은 직감했다. 이 여자는 지금 포장마차에 허기를 채우러 온 게 아니다.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거리의 변호사 최재민’

"식사하러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여자의 시선이 명함에 박혔다. ‘최재민’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변호사님… 맞죠? 일진 파이낸스… 박철민 잡은 그 변호사님…."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나.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최재민입니다."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갑자기 테이블 위로 엎드려 오열하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울음이었다. 어깨가 부서질 듯 들썩였지만,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민수가 당황해서 재민을 쳐다봤다. 재민은 고개를 저으며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 후,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화장이 번져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결심이 섰다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제 이름은… 김소연이에요. JS 홀딩스… 비서실에서 근무했습니다."

JS 홀딩스.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재민의 미간이 좁혀졌다. 민수의 표정도 굳어졌다. 박철민 최종 판결 때 만났던 그 남자, 강.. 동철 이사가 속한 곳. 사채업자들의 뒷배이자 거대한 악의 축.

"JS 홀딩스라면… 대기업 아닙니까?" 민수가 물었다. 김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는 건실한 투자 회사죠. 하지만… 그 안은 지옥이에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 안에는 날짜별로 정리된 메모와 USB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박수현… 그 개자식이… 저를…." 김소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치욕스러운 기억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재민은 박수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JS 홀딩스 박창길 회장의 외아들. SNS에서는 ‘기부 천사’, ‘소탈한 재벌 3세’로 포장되어 있지만, 법조계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마약, 폭행, 도박. 죄를 돈으로 막은 전과만 수십 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수현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재민이 낮게 물었다. 김소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3개월 전이었어요. 회식 자리에서… 술에 약을 탔어요. 눈을 떴을 때는 호텔이었고…." 그녀의 손톱이 테이블을 긁었다. "신고하려고 했어요. 바로 경찰서로 가려고 했는데… 그놈이 영상을 보여줬어요. 그 짓을 하는 장면을… 찍어놨더라고요. 신고하면 회사 게시판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 다 뿌리겠다고…."

"개자식…." 민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뒤로 지옥이 시작됐어요. 노예처럼 불렀어요. 회사에서, 집에서, 심지어 차 안에서…. 죽고 싶었어요. 몇 번이나 옥상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억울해서 못 죽겠더라고요. 내가 왜? 잘못은 그놈이 했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해?"

김소연은 손에 쥐고 있던 USB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안에… 그놈이 찍은 영상 원본이랑, 마약 거래 장부, 그리고 정재계 인사들 접대 리스트가 들어있어요.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목숨 걸고 모았어요."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재민을 바라봤다. "변호사님. 단죄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놈들은…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대형 로펌 ‘태산’이 뒤를 봐주고 있고, 경찰, 검찰 다 한통속이에요. 저 혼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바위에 흠집이라도 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재민은 USB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증거물이 아니었다. 한 여자의 찢긴 영혼이자, 목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상대는 ‘태산’. 그가 몸담았던, 그리고 그를 배신했던 친정이었다. 운명치고는 꽤 짓궂었다.

"소연 씨." 재민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요? 맞습니다. 깨지겠죠. 하지만 견고하게 쌓은 천 리 둑도 개미구멍 하나에 무너지는 법입니다. 저들이 쌓아 올린 저 거대한 성벽 틈새에, 우리가 계란 하나 정도의 균열만 낼 수 있다면… 무너뜨리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재민은 민수를 바라봤다. 민수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이번엔 사이즈가 좀 큰데요?"

"왜? 쫄리냐?"

"아니요. 몸이 근질거려서 죽겠어요. 저런 쓰레기들은 재활용도 안 되는데, 소각장으로 보내버려야죠."

재민은 다시 김소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의뢰받겠습니다. 대신 수임료는 후불입니다. 박수현 그놈, 감옥에 처넣고 나서 위자료 왕창 받아내면 그때 주세요.”

김소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이번에는 절망이 아닌, 희망의 눈물이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소연은 연신 재민에게 고개를 숙이며 울먹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재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정보 없음. 재민은 직감했다. 놈들이다. 김소연이 사라진 걸 눈치챈 것이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을 켰다.

"최재민 변호사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강동철입니다."

지난번 법원 복도에서 명함을 건네던 그 남자, JS 홀딩스의 해결사 강동철 이사였다.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포장마차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김소연이 숨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민수가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볼일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재민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사 여직원 하나가 중요한 물건을 훔쳐서 달아났거든요. 혹시나 해서 위치를 추적해 봤더니, 변호사님 계신 곳 근처로 나오네요? 우연치고는 참 묘하죠?"

"글쎄요. 여긴 저랑 제 파트너가 가락국수 먹으러 온 곳이라. 도둑고양이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요."

"하하하. 거짓말도 잘하시네. 변호사님, 지난번에 제가 경고했었죠? 너무 깊이 들어오지 말라고. 이번 건은 박철민 같은 양아치 수준이 아닙니다. 감당 못 하세요. 지금 그 여자랑 물건, 조용히 넘기시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재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세요, 강 이사님. 제가 돈 욕심이 있었으면 태산에 계속 있었겠죠? 그리고 당신들이 잃어버린 물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주인한테 돌려주는 게 아니라 경찰한테 주는 게 내 원칙이라서.”

"……후회하실 겁니다. 이번엔 꼬리 자르기로 안 끝나요. 당신 목, 진짜로 걸어야 할 겁니다."

"걱정 마십쇼. 내 목은 꽤 튼튼하니까. 그리고 전해, 박수현한테. 목 닦고 기다리라고."

뚝. 전화를 끊자마자 재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수야, 튀자. 놈들이 근처에 있어." "예? 벌써요?" "위치 추적했다고 했잖아. 10분, 아니 5분 안에 들이닥칠 거야."

세 사람은 포장마차를 빠져나와 어둠이 깔린 골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재민은 웃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진짜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전율 때문이었다.

민수가 달리면서 소리쳤다. "형님! 근데 우리 어디로 갑니까? 고시원은 위험하잖아요!"

"일단 뛰어! 놈들이 예상 못 한 곳으로 간다!"

재민의 시선이 화려하게 빛나는 강남의 마천루, 그중에서도 가장 높게 솟은 JS 타워를 향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살아남아, 저 거대한 성벽에 균열을 낼 송곳을 갈아야 할 때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세단 몇 대가 포장마차 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재민은 김소연의 손목을 잡고 지하철 입구로 몸을 날렸다. "꽉 잡아! 놓치면 죽는다!"

지하철 2호선의 육중한 쇠바퀴 소리가 그들의 심장 박동 소리와 겹쳐졌다. 이 밤은 길고도 치열할 듯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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