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펑- 펑- 펑-!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는 마치 하얀빛의 소나기 같았다. 검찰청 앞마당을 가득 메운 수십 개의 렌즈가 일제히 김소연과 최재민을 향해 번쩍였다. 그 빛의 폭격 속에서 김소연은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옆에는 민수가, 그리고 뒤에는 큰 산 같은 마도식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변호사 최재민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포식자의 가면을 벗기겠습니다."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재민은 미리 준비한 보도자료를 들어 보였다.
“어제부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일명 '꽃뱀 비서' 사건. JS 홀딩스와 법무법인 태산이 조작한 이 프레임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밝히러 왔습니다.”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법원 내 상대측에 서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태산'이라는 단어를 직접 입에 올린 것이다. 재민은 김소연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녀의 손은 긴장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각오가 선 듯 눈빛만큼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마스크를 내렸다. 멍들고 수척해진, 그러나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맨얼굴이 드러났다.
“저는... JS 홀딩스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김소연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박수현 상무는 저에게 마약을 투약하고 성폭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빌미로 수개월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제가 저항하려 하자, 그들은 제 가족을 협박하고 저를 꽃뱀으로 몰아 매장시키려 했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낡은 다이어리와 USB를 꺼내 높이 들었다. “이 안에는 박수현 상무가 저지른 성범죄 영상 원본, 그리고 그동안 정재계 인사들에게 전달된 뇌물 장부가 들어있습니다. 심지어 어제 새벽, 그들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현금을 빼돌리는 현장 영상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질문을 쏟아냈다. “증거가 확실합니까?”, “뇌물 리스트에 현직 국회의원도 있습니까?”, “태산이 개입했다는 근거는 뭡니까?”
재민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모든 원본은 지금 즉시 검찰에 제출할 것입니다. 만약 검찰이 이번에도 '봐주기식 수사'를 한다면, 저는 이 자료를 외신과 시민단체에 남김없이 공개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거대 로펌의 하수인인지, 국민의 수호자인지 똑똑히 지켜보겠습니다.”
재민은 말을 마치자마자 김소연을 데리고 청사 안으로 향했다. 취재진이 몰려들었지만, 마도식이 거대한 팔을 벌려 그들을 막아섰다. “비키쇼! 길 막으면 다 업무방해요!” 마도식의 험상궂은 호통과 민수의 필사적인 방어 덕분에 일행은 무사히 검찰청 민원실로 진입할 수 있었다.
유리문이 닫히고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자, 그제야 김소연의 다리가 풀렸다. 재민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고생했어요. 정말 잘했습니다.” 김소연은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오랫동안 목을 조르던 올가미가 마침내 끊어진 것 같은 지독한 안도감이었다. 그녀는 언제 부서질지 몰라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비로소 늘어뜨리며 그동안 참아왔던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해냈다.
같은 시각. JS 홀딩스 본사 펜트하우스. 챙그랑-! 최고급 크리스털 위스키 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박수현은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거실을 미친개처럼 서성거리고 있었다. TV 화면에서는 김소연의 기자회견이 속보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저, 저 미친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야! 강동철! 너 뭐 했어! 막으라고 했잖아!” 박수현이 악을 쓰며 소파에 앉아 있는 강동철에게 묵직한 재떨이를 집어던지려 했다. 강동철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려했지만, 윽, 하는 신음과 함께 동작을 멈췄다. 어젯밤 마도식에게 무참히 짓밟힌 탓에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흉통이 밀려와 숨조차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하는 것을 포기한 그는 꼼짝없이 눈만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구급차를 타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상상? 네가 소설가냐? 상상을 하게! 내 인생이 끝장나게 생겼는데... 이 씨-!”
“그만.”
낮지만 묵직한 목소리가 광기 어린 소란을 잠재웠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걸어 들왔다. JS 홀딩스의 회장, 박창길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와 아들 박수현의 앞에 섰다.
“아, 아버지... 이건 오해입니다. 저 년이 돈 뜯어내려고 작정하고...” '짝!' 건조하고 날카로운 파열음. 박수현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박창길의 손은 매서웠다.
“약 끊으라고 했지.”
“......”
“계집질도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뒤처리도 못 하는 모자란 놈.” 박창길은 쓰러진 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의 눈은 TV 화면 속 최재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최재민... 태산에 있던 놈이지? 1년 전 그 지하철 사건으로 나간.”
“예, 회장님. 아주 독종입니다. 어젯밤 저희 비밀 창고까지 털렸습니다.” 강동철이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박창길은 혀를 찼다. “강 이사. 자네는 주먹만 쓸 줄 알지 머리가 없어서 문제야. 21세기에 용역 깡패? 구급차? 그러니까 당하는 거야.” 그는 비서에게 손짓했다. “태산의 오 대표 연결해. 그리고 홍보팀 불러서 전면전 준비하라고 해. 주먹으로 안 되면, 법으로 찢어발겨야지.” 박창길의 눈이 뱀처럼 차갑게 빛났다. “감히 내게 흠집을 내?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뼈저리게 가르쳐주마.”
기자회견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검찰은 여론을 의식해 즉각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김소연의 증거물은 감식반으로 넘어갔고, 박수현에게는 출국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재민의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재민은 알고 있었다.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검찰청 조사실 앞.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재민을 담당 수사관이 난색을 표하며 막아섰다.
"최 변호사님, 이번 조사는 정식 조서 작성 전, 사건 경위만 파악하는 의례적인 사전 면담입니다. 피해자의 심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일단은 혼자 모시겠습니다."
"피해자 대리인의 정당한 동석 요구를 막는 규정이 어디 있습니까? 뻔한 핑계 대지 마시죠." 재민이 차갑게 맞받아치며 억지로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변호사님." 김소연이 재민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괜찮아요. 저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소연 씨. 이건 태산 쪽 입김이 들어간 놈들의 수작일 확률이 높습니다. 안에서 무슨 말로 압박할지 모릅니다."
"알아요. 하지만..." 소연은 퀭한 눈으로 밤을 새운 재민과 민수를 번갈아 보았다.
"언제까지 두 분 등 뒤에 숨어서 떨고만 있을 순 없어요. 거대한 괴물 앞이라도, 제 입으로 직접 진술하고 싶어요. 의례적인 면담이라면 혼자서 부딪혀 볼게요. 저 이제, 안 도망칠 겁니다." 단단해진 그녀의 눈빛에 재민은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대신 그는 매서운 눈으로 수사관의 명찰을 쏘아보며 경고했다.
"단순 면담을 빙자한 유도신문이나, 2차 가해성 발언이 단 한 마디라도 나오면... 당장 대검에 감찰 요구하고 사건 재배당 진정 넣을 겁니다. 언론에 검찰과 태산의 짬짜미 수사로 대서특필되는 꼴 보기 싫으면 선 잘 타시죠." 수사관이 흠칫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재민은 안으로 들어가는 김소연에게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했다.
"조사받고 나오시면 절대 복도에 있는 기자들 질문에 대답하지 마세요. 놈들은 소연 씨의 말실수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소연이 굳은 결의로 고개를 끄덕이고 조사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4시간 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고 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소연의 표정은 들어갈 때의 다짐이 무색할 만큼 잿빛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변호사님... 담당 검사님이 이상해요."
"왜요? 무슨 압박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특별히 강요나 압박은 없었는데... 자꾸 영상을 보면서 이거 조작된 거 아니냐, 딥페이크 기술이 요즘 정교하다던데라며 딴소리를 해요. 제 진술보다는 기술적인 오류를 찾으려는 느낌이었어요."
재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딥페이크?'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 시각, 서초동 법무법인 태산의 대회의실. 대한민국 법조계를 쥐락펴락하는 태산의 대표 변호사 오영석이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불미스러운 의혹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 박수현 상무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오영석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우아한 엘리트의 가면 뒤에 숨겨두었던 서늘하고 교활한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우리는 김소연 씨가 제출한 증거의 신빙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스크린에 김소연이 제출한 영상의 캡처본과, 또 다른 영상을 나란히 띄웠다.
"왼쪽은 김 씨가 제출한 영상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최근 유행하는 AI 딥페이크 기술로 만든 가짜 영상입니다. 보시다시피 육안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오영석은 레이저 포인터로 화면을 가리켰다.
“저희가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에게 의뢰한 결과, 김 씨가 제출한 영상에서 픽셀 단위의 부자연스러운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김 씨는 과거 아버님의 빚을 갚기 위해 영상 편집 기술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기자들의 타자 소리가 미친 듯이 빨라졌다. 프레임이 바뀌고 있었다. '성폭행 피해자'에서 '치밀한 조작범'으로.
"또한 뇌물 장부라고 주장하는 엑셀 파일?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조작된 영상과 엑셀 파일 하나로 건실한 기업을 무너뜨리려는 시도... 이것이야말로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오영석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저희는 김소연 씨를 무고, 명예훼손 그리고 사문서 위조 혐의로 역고소하겠습니다. 아울러 이 모든 사기극을 기획하고 조종한 배후, 최재민 변호사에 대해서도 변호사법 위반 및 공갈 혐의로 고발 조치합니다."
은신처인 마도식의 창고. TV를 보던 민수가 리모컨을 집어던졌다.
"와... 진짜 악마 새끼들이네! 딥페이크? 지들이 약 먹이고 찍어놓고 이제 와서 가짜라고?" 민수는 분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형님! 저거 다 거짓말인 거 밝혀질 거 아닙니까? 원본 파일 메타데이터 보면 날짜랑 다 나올 텐데!" 재민은 굳은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야. 디지털 포렌식 결과가 나와서 진위를 가리는 데만 최소 한 달, 길면 반년이 걸려. 그동안 여론은 김소연 씨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기억하게 될 거야. 태산은 그걸 노린 거고."
마도식이 혀를 차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법 기술자 놈들, 주먹보다 더 씨-게 때리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요? 놈들이 저렇게 나오면 우리가 가진 패는 다 휴지 조각 되는 거 아니요?"
재민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태산의 오영석. 재민의 사수였던 사람이다. 그는 증거를 탄핵하는 데 있어 귀신같은 능력을 가진 자였다. 그는 지금 '진실 게임'을 '기술 게임'으로 변질시켰다.
"소연 씨, 혹시 박수현이 약을 탈 때 썼던 술잔이나, 호텔에 남겨둔 물건... 뭐라도 챙겨 온 거 없습니까? DNA가 묻어있는 실물 증거가 필요해요. 디지털 자료는 놈들이 계속 조작설을 퍼트릴 겁니다." 김소연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도망치기 바빠서... 옷도 다 그놈들이 버렸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태산이 치밀하게 짜놓은 '김소연 딥페이크 조작설'이라는 거짓 프레임이 순식간에 모든 여론을 집어삼켰다. 심지어 검찰 내부에서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박수현의 출국 금지를 해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늦은 밤, 재민은 창고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놈들이 법과 기술로 장난을 친다면... 나는 그들이 절대 조작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마도식이었다. "최 변호사. 표정이 왜 그래? 다 끝난 사람처럼."
"형님. 태산이라는 벽, 생각보다 더 높고 단단하네요. 제가 썼던 칼날이 제 목을 겨누고 있는 기분입니다."
마도식은 씩 웃으며 재민의 어깨를 툭 쳤다.
"벽이 높으면 밑을 파면되지. 자네가 그랬잖아. 썩은 바위는 작은 균열에도 무너진다고."
"균열을 낼 망치가 부러졌습니다."
"망치? 여기 있잖아." 마도식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쪽지 하나를 꺼내 건넸다.
"아까 낮에, 내 가게 단골인 퀵서비스 기사가 주고 간 거야. 강동철이 밑에 있던 애들 중에 하나가 팽 당할까 봐 겁먹고 잠수 탔다던데. 그놈이 숨어있는 곳 같아."
재민이 쪽지를 펴봤다. 인천의 한 모텔 주소와 호수가 적혀 있었다. 강동철의 부하. 현장에 있었던 공범. "이놈... 박수현이 약 타는 걸 직접 봤을 수도 있겠군요."
"산 증인은 딥페이크라고 못 우기겠지? 잡으러 가보자고. 운전대는 내가 잡아줄 테니까." 재민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디지털이 안 된다면, 아날로그로 승부한다.
“민수야! 장비 챙겨! 인천 간다!” 재민의 외침에 창고 안에서 자고 있던 민수가 벌떡 일어났다.
“예, 형님! 출동입니까?”
다시 구급차의 시동이 걸렸다. 엔진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태산이 쌓아 올린 거짓의 성벽, 그 밑바닥을 파내기 위한 야수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