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의 펜트하우스(6)

포섭

by 추억바라기

인천 월미도 인근, 시간이 멈춘 듯한 북성동의 모텔촌.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에는 비릿한 짠내와 오래된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가로등은 태반이 깨져 있었고, 드문드문 켜진 붉은색 네온사인만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핏물처럼 번져 있었다.

새벽 2시 40분. 어둠을 틈타 낡은 구급차 한 대가 엔진 소리를 죽인 채 골목 어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긴급 출동 경광등은 꺼져 있었지만, 차가운 날씨 탓에 차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운전석의 마도식이 창문을 조금 내리고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킁킁. 딱 쥐새끼 숨기 좋은 날씨네. 비릿하고, 폐유 썩은 내처럼 찌든 냄새가 진동을 해."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차창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며 백미러를 확인했다. 조수석에 앉은 재민은 마도식이 건네준 꼬깃꼬깃한 쪽지를 다시 펴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적힌 주소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인천시 중구 북성동, 파라다이스 모텔 302호'

강동철의 측근이자, 사건 당일 박수현의 룸살롱 술자리에 동석했던 수행비서 최정우의 은신처 주소였다. 그는 태산이 설계한 꼬리 자르기의 희생양이 될 것을 직감하고 잠적해 버린 핵심 증인이었다.

"형님, 확실합니까? 놈이 여기 있다는 거."

뒷좌석에서 민수가 야구방망이를 챙기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며칠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마도식은 룸미러로 민수를 보며 씩 웃었다. 누런 니코틴이 낀 이가 어둠 속에서도 유독 번뜩였다.

"내 정보통이야 확실하지. 인천항에서 밀항선 브로커 하는 동생이 있는데, 오늘 밤 급한 화물 하나가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사람을 화물 취급하는 거 보니 딱 그놈이다 싶었지."

"시간이 없군요. 밀항선이 뜨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재민이 차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민수는 뒷문 지켜. 혹시라도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마 사장님은 저랑 정문으로 들어가시죠."

"오케이. 그럼 몸 좀 풀어볼까."

마도식이 우두둑 목을 꺾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파라다이스 모텔 302호.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는 좁은 방 안. 최정우는 짐가방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손은 알코올 중독자처럼 덜덜 떨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침대 위에 켜놓은 TV 뉴스에서는 종일 박수현 성폭행 의혹이 보도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강동철 그 개자식...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려는 게 분명해."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박수현이 눈짓을 하자 강동철이 자신에게 건넸던 하얀 가루를. 그리고 김소연이 쓰러지자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다'라며 촬영을 지시했던 그날의 역겨운 상황이 기억나 몸서리 쳐졌다. 만약 수사가 제대로 시작되면, 박수현은 로펌 뒤에 숨고 강동철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남는 건 실행범인 자신뿐이었다.

'태산이 김소연을 매장시키는 꼴을 봤잖아. 다음 차례는 나야. 사회적 매장이 아니라 아예 매장을 당할 거야. 정말 잡히면 끝장이다.'

"빨리, 빨리 나가야 해..." 최정우는 현금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여권을 챙겼다. 브로커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쌓던 짐을 챙겨 들고, 그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쾅-! 낡은 나무 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나며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경첩이 뜯겨 나가는 쇳소리가 마치 폭발음처럼 크게 울렸다. "으아아악-!" 최정우는 뜯겨 나오는 문짝에 부딪혀 뒤로 나자빠졌다.

먼지 사이로 문지방을 넘어 들어온 거대한 그림자. 마도식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성큼성큼 들어왔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아휴-, 손님. 체크아웃이 너무 빠르신 거 아니요? 룸서비스 아직 안 나갔는데."

"누, 누구야! 오지 마!" 최정우가 바닥을 기어가며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휘둘렀다. 은색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마도식에겐 그건 아이들 장난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어디 어른 앞에서 흉기를 꺼내?"

마도식은 귀찮다는 듯 놈의 손목을 가볍게 낚아채 비틀었다. "아아악!"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짤랑 소리와 함께 최정우가 무릎을 꿇었다. 뼈가 어긋나는 고통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 뒤로 코트 깃을 세운 재민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뒹구는 짐가방과 여권 그리고 쏟아져 나온 현금 뭉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중국으로 가시게? 태산이 거기까진 못 쫓아올 것 같아?" 최정우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재민을 올려다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뉴스에서, 그리고 법조계 찌라시에서 수없이 봤던 남자.

"최... 최재민 변호사?"

"잘 아시네. 내 얼굴을 안다는 건, 내가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도 안다는 뜻이겠지." 재민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의 태도는 마치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것처럼 여유로웠지만, 눈빛은 살을 벨 듯 날카로웠다.

"강동철이 시키셨나? 나가서 죽은 듯이 살라고?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될까 봐 알아서 잠적하는 건가?"

"무,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네가 중국에 도착하면 누가 마중 나올까? 강동철이 보낸 브로커? 아니면 태산이 고용한 청부업자?" 재민이 상체를 숙여 최정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밀항선 타는 순간, 넌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실종 처리될 거야. 그리고 박수현의 모든 죄는 사라진 수행비서 최정우의 단독 범행으로 종결되겠지. 태산 시나리오, 뻔하잖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최정우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앞으로 그려질 현실이었다. 그도 내심 두려워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강동철은 의리를 지키는 위인이 아니었다. 필요 없어진 사냥개는 삶아 먹는 게 그들의 법칙이었다.

"나...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맹세해! 약을 타라고 한 건 박 상무였고, 영상 찍으라고 한 건 강 이사였다고! 난 그냥 시키니까..."

"그래, 그거야." 재민이 품에서 녹음기를 꺼내 켰다. 붉은색 녹음 램프가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그걸 여기서 나한테 말하지 말고, 법정에서 말해. 네가 살길은 그것뿐이야."

"하지만... 태산이야. 그 사람들은 못 이겨. 김소연도 꽃뱀으로 만들었는데, 나 같은 건 그냥 쓰레기로 만들 거라고!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최정우는 절망에 차 울부짖었다. 태산이 내세운 딥페이크 조작설은 너무나 강력하고, 견고했다. 사람의 기억은 조작될 수 있고, 진술은 번복될 수 있다. 태산은 그 틈을 파고들 것이 분명했다.

이때, 마도식이 옆에서 주먹을 감싸고, 우두둑 손가락 뼈소리를 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최정우의 칼을 집어 들어 사과 깎듯 만지작거렸다.

"어이-, 최변호사. 말로 해서 듣겠어? 그냥 여기서 반쯤 접어서 강동철한테 택배로 보내주자고. 착불로 보내면 좋아라 하겠네."

공포에 질린 최정우가 다급히 손을 저었다. "자, 잠깐만! 이, 있어! 증거 있어!"

"증거?"

"핸드폰! 그날 촬영했던 대포폰! 그거 안 버렸어!"

재민의 눈썹이 꿈틀 됐다.

"강 이사가 부셔서 버리라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나중에 토사구팽 당할까 봐 보험용으로 가지고 있었어. 그 안에 원본 영상이랑, 박 상무가 약 타라고 지시한 카톡 내용 다 들어있어!"

최정우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 안쪽 깊숙한 곳을 찢었다. 안감 속에 숨겨져 있던 은박지 뭉치가 나왔다. 그가 은박지를 벗겨내자, 액정이 깨진 구형 스마트폰 하나가 드러났다.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머릿속으론 이미 법정에서 태산의 논리를 짓밟을 계산이 끝났다.

디지털 포렌식 공방? 딥페이크 전문가 교차 검증? 다 필요 없는 짓거리였다. 촬영에 사용된 하드웨어 원본이 존재하는 이상, 기기 내부 메모리에 각인된 고유 로그 기록은 해킹으로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태산은 입막음을 위해 최정우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파묻을 생각이었겠지만, 사지로 몰린 쥐가 기어코 고양이의 목줄을 끊을 칼을 토해낸 셈이다.

"잘 생각했어. 이게 네 목숨줄이야."

재민은 스마트폰을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온 민수에게 말했다. "데리고 나가."

행선지를 모르는 마도식과 최정우가 재민을 보자 둘을 번갈아 보며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울중앙지검으로 가야죠."

"서, 서울? 지금 가면 잡히는 거 아니야?" 최정우가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재민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우린 지금 태산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거야. 가장 화려하고, 요란하게."


다음 날 아침 8시. 서초동 법무법인 태산의 대표 변호사 집무실. 오영석 대표는 갓 내린 에스프레소 향을 음미하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아래로 보이는 서초동 법조 타운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여론은 완벽하게 태산의 편이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은 '김소연 구속 임박', '꽃뱀의 최후' 같은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최변. 감정만 앞세우면 필패한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오영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인터폰을 눌렀다. "김 변호사-, 검찰 쪽에 연락해서 오늘 오전 중에 김소연 영장 청구하라고 해. 박창길 회장님께서 점심 전까지 마무리 짓길 원하신다."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비서가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왔다. 평소 냉철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리고 있었다. "대,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지, 지금 뉴스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영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아침부터 호들갑은. 김소연이 자살 소동이라도 벌였나?" 그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서울중앙지검 로비가 송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어제 꼬리를 내리고 사라진 줄 알았던 최재민이 다시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금이라도 얼굴을 감춰보려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남자는 오영석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최정우였다. 자막이 화면 하단을 붉게 물들였다.

'속보! 최재민 변호사, 박수현 성폭행 사건 핵심 증인 대동하고 검찰 자진 출석'

오영석의 손에서 에스프레소 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 놈은... 강동철 밑에 있던...?'

화면 속 재민이 수많은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카메라 렌즈를 뚫고, 마치 집무실에 있는 오영석을 정면으로 노려보는 듯했다.

"어제 태산 측은 피해자가 제출한 증거가 정교하게 조작된 딥페이크라고 주장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린 아주 그럴듯한 기술적 변명이었죠." 재민의 목소리에는 분노 대신 차가운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세밀한 기술 조작으로 거짓말을 해도, 거짓이 모든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 그 영상을 직접 촬영한 당시 수행비서가 양심선언을 하러 왔습니다. 또한..." 재민은 안주머니에서 최정우가 건넨 스마트폰을 꺼내 높이 들어 보였다.

"태산이 주장하는 딥페이크 기술적 오류? 데이터 복사본이라면 억지라도 부려볼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 핸드폰은 범행 현장을 그대로 담아낸 원본 하드웨어 그 자체입니다." 현장의 플래시가 사방에서 하얗게 터졌다. 재민은 핸드폰을 카메라 앞에 들이밀었다.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아 조작할 틈조차 없었던 이 기기 앞에서도 가짜라고 우길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습니다."

옆에 있던 최정우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박수현 상무가... 시켰습니다. 약도, 촬영도... 전부 다 사실입니다. 태산 변호사들이 시나리오 짜준 대로 거짓말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챙그랑! 오영석이 들고 있던 에스프레소 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검은 액체가 최고급 페르시아 양탄자를 더럽혔다. "저... 저런 쥐새끼 같은 놈이...!"

완벽했던 논리가 무너졌다. 수억 원을 들인 디지털 포렌식 분석 보고서가, 가장 단순한 '사람'과 '낡은 스마트폰' 하나 때문에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정교하게 세공된 법 기술도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의 절박한 목소리 앞에서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재민은 가장 원초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 놈들의 가장 비싼 방어막을 일격에 뚫어 판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오전 11시. 검찰청 조사실. 분위기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최정우의 자백과 원본 핸드폰의 등장으로 검찰도 더 이상 태산의 눈치만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소연에 대한 구속 영장은 반려되었고, 오히려 박수현에 대한 긴급 체포 영장이 전격 발부되었다.

재민은 조사실 밖 복도 벤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옆에는 민수와 마도식이 앉아 있었다. 셋 다 밤을 꼬박 새워 눈이 퀭하고 옷에서는 쉰내가 났지만, 표정만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밝았다.

"형님, 한 방 먹였습니다! 와, 아까 기자들 표정 보셨습니까? 오영석 그 양반 지금쯤 혈압약 찾고 있겠는데요?" 민수가 신이 나서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마도식은 하품을 크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이구, 허리야. 나이 먹어서 밤샘은 힘들구먼. 최 변호사, 이제 끝난 건가? 나 좀 가서 사우나라도 하고 잠 좀 자도 될까?"

재민은 빈 종이컵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아직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엥? 박수현이 잡히면 끝인 거 아녀?"

"박수현은 그저 미끼였을 뿐입니다. 깃털 하나 뽑았다고 독수리가 죽진 않죠." 재민은 주머니에서 김소연이 줬던 USB를 다시 꺼내 만지작거렸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파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VIP_List.hwp'

"이 안에 적힌 사람들... 아마 지금쯤 떨고 있을 겁니다. 태산은 이제 박수현을 버릴 겁니다. 꼬리를 자르고 몸통을 살리려 하겠죠. 개인의 일탈이라고 선을 그으면서요. 우린 그 틈을 타서 몸통의 목을 쳐야 합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화려한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떼로 몰려나왔다. 태산의 변호인단이었다. 그 위압적인 무리의 맨 앞에는 오영석 대표가 있었다. 그는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 대신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재민에게 다가왔다.

"최재민." 오영석이 재민의 코앞에 서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제법이구나. 내 밑에서 배운 걸 이렇게 써먹다니. 개한테 밥을 줬더니 주인을 무는 꼴이군."

재민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오영석과 시선을 맞췄다. 대한민국 최고 로펌 대표의 기세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눈빛이었다. "대표님한테 배웠죠. '증거는 조작할 수 있어도, 사람은 조작할 수 없다'라고. 아, 반대였던가요? 대표님은 사람도 조작하시니까."

오영석의 눈썹이 꿈틀 했다. 살기가 감돌았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박수현 하나 잡았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으냐? 넌 지금 수십 층짜리 마천루에서 유리창 하나를 깬 것뿐이야. 그 알량한 도발 때문에, 쏟아져 내리는 유리 파편에 찔려 죽는 건 너다. 네가 지키려는 저 떨거지들까지 전부 다."

오영석의 시선이 마도식과 민수를 경멸하듯 훑었다. 마도식이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재민이 팔을 뻗어 막았다. 재민은 오영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기초가 썩어 문드러진 건물이라면 무너뜨려야죠. 그리고 전 유리창을 깬 게 아닙니다." 재민은 손에 쥔 USB를 들어 보였다. "메인 기둥을 날려버릴 폭약을 쥔 겁니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으니, 아무리 태산이라도 붕괴를 막을 순 없을 겁니다. 준비하십쇼, 대표님. 다음은 당신 차례니까."

오영석의 눈이 USB에 꽂혔다. 순간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아무 말 없이 변호인단을 이끌고 조사실로 들어갔다. 철커덩. 조사실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재민은 뒤돌아 섰다. "가시죠. 이제 마지막 라운드 준비하러."

민수와 마도식이 재민의 양 옆에 섰다. 낡은 점퍼와 작업복, 그리고 구겨진 양복.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남자의 그림자가 검찰청의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밖에는 밤새 내리던 겨울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검찰청 앞마당을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아직 어둡고 험난한, 진짜 포식자들이 사는 펜트하우스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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