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 7편] 우리는 왜 서로를 잡아먹는가?

by 이안

오늘 저녁, 여러분의 식탁에는 무엇이 올라왔었나요?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 달콤한 소스가 뿌려진 요리를 보며 우리는 입맛을 다십니다. 행복한 식사 시간입니다. 그런데 잠시만 아주 불편한 상상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만약 그 접시 위에 놓인 고기가, 오늘 아침 내가 쓰다듬고 나온 반려견이나 반려묘라면 어떨까요? 혹은 말을 할 줄 아는, 눈망울이 깊은 어떤 생명체였다면요. 우리는 과연 포크를 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동물을 먹습니다. 이 모순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마트에서 아주 깔끔하게 손질된, 눈도 마주칠 일 없는 살코기 팩만을 구매합니다. 비명 소리와 피 냄새는 저 멀리 도살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격리시켜 버렸죠.


오늘 우리가 펼쳐볼 능가경의 일곱 번째 페이지는,
인류가 애써 외면해 온 이 거대한 모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불교 경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단호하게 육식을 금지하는 경전, 능가경.


부처님은 왜 그토록 단호하게 서로를 잡아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건 단순히 식단 조절이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와 세상의 관계, 그리고 잃어버린 자비심의 회복에 대한 아주 서늘하고도 뜨거운 이야기입니다.


경전의 세계


능가경의 후반부, 대혜보살은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집니다.

세존이시여, 세상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수행자들 중에서도 고기를 먹어도 된다, 안 된다 논쟁이 많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이 정말 수행에 방해가 됩니까?

평소 온화하게 비유를 드시던 부처님은, 이 대목에서만큼은 추상같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대혜여, 고기를 먹지 마라. 수행자는 그 어떤 동물의 고기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이유로 아주 충격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십니다.


대혜여, 시작을 알 수 없는 옛날부터 생사윤회하는 동안,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 치고 너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형제자매나 자식이 아니었던 존재는 하나도 없다.


능가경은 말합니다. 지금 네가 잡아먹으려는 저 소나 돼지가, 전생에는 너를 낳아준 어머니였을 수도 있고, 너와 깊은 사랑을 나눴던 연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옷만 바꿔 입고 태어났을 뿐, 본질적으로는 한 식구라는 것이죠.


부처님은 묻습니다.

어찌 차마 부모와 형제였던 이의 살을 씹어 삼키고 피를 마시겠느냐.

또한 경전은 육식의 폐해를 심리적으로 묘사합니다. 고기를 즐겨 먹는 자에게는 살기(Rakshasa)가 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숲 속에 들어가면, 짐승들이 그 피 냄새를 맡고 본능적인 공포를 느껴 도망치거나 적대감을 드러낸다고 하죠. 반대로 자비로운 수행자 곁에는 사나운 짐승도 편안하게 눕는다고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육식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대자비의 씨앗(Compassion Seed)을 말려 죽인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내 즐거움으로 삼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교학적 해석


사실 초기 불교에서는 탁발, 즉 음식을 얻어먹었기에 주는 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깨끗한 고기(삼정육)는 허용되기도 했죠. 하지만 대승불교, 특히 우리의 마음을 다루는 능가경에 와서는 이것이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왜일까요?


능가경은 율법서가 아니라 심리서이기 때문입니다. 능가경이 걱정하는 것은 고기라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 바로 공감 능력의 상실입니다.


다른 생명의 공포와 고통을 외면해야만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도살장에서 그 동물이 느꼈을 극심한 공포, 살고 싶다는 처절한 몸부림. 우리는 고기를 씹을 때 그 진동을 함께 섭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육식은 타자화(Othering)의 극치입니다. 나와 너를 철저히 분리해야만 가능합니다. 너는 생명이 아니라 음식이야. 너는 고통을 느끼는 주체가 아니라 단백질 덩어리야.


이렇게 대상을 사물화 하는 습관이 들면, 그 칼끝은 결국 사람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타인을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보고, 약자를 착취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적 심리. 부처님은 육식이 바로 이런 무자비한 마음을 키우는 훈련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법(Interdependent Arising)을 깨달은 자에게, 밥상은 더 이상 허기를 채우는 곳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이 만나는 엄숙한 자리가 됩니다.


현대적 연결


이 2천 년 전의 가르침은, 공장식 축산과 기후 위기를 맞은 21세기에 더욱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현대 뇌과학에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타인의 행동이나 감정을 볼 때, 내 뇌의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되는 신경 세포입니다. 누군가 우는 것을 보면 나도 슬퍼지고, 누군가 다치면 나도 찡그리게 되죠. 인간은 본래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도록 설계된, 공감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식탁 위에서 이 거울 뉴런을 강제로 끕니다. 넷플릭스 영화 옥자(Okja)를 보셨나요? 주인공 소녀 미자는 슈퍼 돼지 옥자의 눈을 들여다봅니다. 그 깊은 눈망울에서 슬픔과 기쁨, 우정을 읽습니다. 눈을 본 사람은 절대 그 존재를 먹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 눈을 가립니다. 고기를 깔끔한 팩에 담아 상품처럼 진열함으로써, 생명의 흔적을 지웁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인류의 진화는 공감의 범위를 확장해 온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국가로, 그리고 이제는 인류 전체와 동물, 생태계로.


능가경이 말하는 금지는 억압이 아닙니다. 확장의 초대입니다.

내 입의 즐거움보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이 확장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우주적 생명의 일부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를 만듭니다(You are what you eat).

공포와 비명을 먹고사는 사람과, 햇살과 흙의 기운을 먹고사는 사람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당장 오늘부터 채식을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겠지요.


다만, 오늘 식사를 할 때 아주 잠시만 멈추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앞에 놓인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생명의 희생으로 내 생명이 이어지고 있는지.

그 생명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미안함을 느끼는 것. 적어도 먹는 행위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않는 것. 그 작은 알아차림이 자비심의 시작입니다.


능가경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를 잡아먹지 말고, 서로를 살리는 밥상이 되어라.

오늘 당신의 식탁에는, 배부름만 있나요, 아니면 연결된 생명에 대한 따뜻한 인사가 있나요?


부디 당신의 한 끼가, 세상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평화로운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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