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문인화 세한도(歲寒圖)가
우리 곁에 오기까지

-겨울이 온 뒤에야 소나무가 푸르렀음을 안다-

by 이안

조선 최고의 문인화라고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전시회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본래 추사 박물관은 제주도와 과천에 있다. 제주도는 추사가 8년간 유배되어있던 곳이 이라서 지난 2010년에 <제주 추사관>을 건립하였고, 과천은 추사가 말년에 거주하면서 그의 학문과 예술이 절정기에 이르렀던 곳이기에, 그를 기리기 해서 2013년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제주에서 유배 중이던 시절 추사는,


“북두칠성에 의거하여 애써 서울을 바라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 죄인이 여기(제주)에 있은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는데, 바다와 하늘은 아득하기만 하고 세월은 급급히 흐르기만 하니, 내가 비록 면목이 있은들 인간의 면목이 있겠습니까, 그저 물고기나 자라와 멀지 않은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배 생활 3년이 되던 해에 추사가 그의 지기 권돈인에게 토로한 말이다. 당시 추사는 효명세자를 무고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같은 이유로 유배중인이었던 그의 벗 윤상도는 이미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당해 죽임을 당했기에 하루하루 죽음이 옥죄어오는 시간을 버텨내며 살고 있었다.


더구나 명문가에 태어나서 조선 후기 늘 학문과 예술의 중심에 있었고, 집안 대대로 권문세가였기 때문에 유복한 생활을 해왔던 추사의 나이 55세에 갑자기 닥친 제주에서의 궁핍한 유배 생활은 버텨내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온몸에 아니 난 데가 없어 가려움이 대단하여 밤에 잠을 못 자고 이리 고생합니다. 그것으로 무슨 염려가 있는 병은 아니나, 몸에만 괴롭기가 못 견디겠으니, 50여 년에 앓아보지 못한 병을 다 앓으니 어찌할까 보오?”

제주도의 추사가 아내 예안 이 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서 하소연을 한 내용이다. 추사는 부인과 동생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먹을거리를 보내달라고 요청도 하고, 끊이지 않는 질병의 고통을 알리는 편지도 자주 보냈다. 1842년 10월 3일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인의 학질 증세를 걱정하면서도, 자신도 풍토병으로 인한 가려움증을 겪고 있음을 호소했고, 이미 눈병, 소화불량,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고, 혀에 종기가 나고, 코에 혹이 생기고, 팔이 아파서 붓을 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파도 물어볼 의원도 없고 약도 없었다. 그저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은, 한 가닥 모진 목숨뿐이다”라고 하소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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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추사 김정희가 아내 예안 이 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의 일부. 1842년 >


이렇게 권력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유배라는 형벌을 받고 죽을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8년을 살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추사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그를 위해서 헌신을 했던 이가 있었느니 바로 역관 이상적이었다. 추사를 섬겼던 이상적은 역관의 신분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면, 가장 귀한 서적을 구해서 제주도의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안동 김 씨 가문에 갖다 주었다면 당장 높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이상적이 늘 흠모했던 이는 추사 김정희였다. 1843년 이상적이 보내준 [대운산방문고]는 청나라 고증학자의 저서와 편지가 수록된 문집이었고, 1844년에 보내준 [황조경세문편]은 무려 12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였다.


청나라에서 서적 간행이 활발했다고는 하나 찍어내는 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원하는 책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적은 김정희가 필요하는 서적과 연경의 최신 소식을, 권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배 중인 죄인에게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 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책 선물에 감동받은 김정희가 이상적에 관한 적은 글이다. 조선 아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인화'라고 칭송을 받고 있는 [세한도]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추사는 역관이자 제자인 이상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에게 그림을 그려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림 옆에 작품 제목, 작가 이름 외에 '제작 동기'를 추사 본인이 소상히 함께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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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우선(=이상적의 호), 이것을 보게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 知松柏之後凋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송백을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성정 때문만이
아니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논어 [자한] 편에서 나온 구절인데, 추사는 여기에서 그림의 제목을 따와 [세한도](세한=설 전후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라 명명했고, 이상적을 추운 겨울에도 늘 푸른 송백에 비유했던 것이다.


이후 국보 180호인 [세한도]와 관련해서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계속되는데, 이상적은 추사가 보내준 [세한도]를 갖고 청나라 연경으로 가서, 당시에 유명한 청나라 문인 16명에게서 [세한도]에 관한 평을 받아온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세한도에는, 가로 70cm 정도의 그림 옆에 청나라 문인들의 글이 약 4미터, 한국 근대인들의 글이 약 8미터 길이로 함께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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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는 당대 문인들과 후대 학자들의 [세한도 평]이 15미터 길이로 이어져 있다>


이렇게 귀한 추사의 그림이 한동안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현재까지도 추사 연구의 일인자로 꼽히는 학자)의 소유로 있었는데, 김정희를 추앙해왔던 한국의 서화가 손재형이 1944년 무작정 일본의 후지쓰카를 찾아가서 두 달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간청해서 후에 국보가 되는 [세한도]를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게 된다.


손재형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도쿄에 폭격이 끊이지 않자, [세한도]가 걱정되어 일본을 찾았던 건데, 실제로 [세한도]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3개월 후, 후지쓰카의 연구소에 있던 자료들은 미군의 도쿄 공습으로 전부 불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의 자택에 보관되어 있던, 2,700여 점의 추사의 유물이 무사히 <과천 추사 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세한도]는 개성 출신의 사업가 손세기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는 특별히 김정희의 작품을 소중하게 보관해 왔고, 2020년 초 그의 아들 손창근(92세)이 아버지의 뜻을 기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들 두고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경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손세기, 손창근 부자는 이미 2018년에 304점의 컬렉션을 기증한 바 있기도 하다.)


오늘 음악이 흐르는 풍경에서 듣고 싶은 노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제작되었던 직접적인 이유였던, 이상적과 김정희의 뜨거운 의리와 정, 그리고 상록수의 기상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다.


[세한도]는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의 천재적인 재능이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이상적의 송백처럼 변치 않는 의리 그리고 추사의 예술을 사모했던 후손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무사히 보존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될 수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겨울의 송백처럼 변치 않는 우리 문화재에 애정과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 상록수(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 / 양희은(김민기 작사·작곡) 중에서 -


[상록수]는 김민기가 1977년에 인천시 한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며, 아침마다 공부를 가르치던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지은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78년에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양희은의 독집 앨범에 수록되었다. 이 음반은 김민기의 1970년대 중후반 주요 작품들이 수록된 음반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긴급조치 시대에 이미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해져 버렸기에 김민기라는 이름 대신, 친구 김아영의 이름을 빌려 작사·작곡자로 명기했었다.


“내가 세한도를 다시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소전(=손재형의 호)이 조선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함이요, 둘째는 그대가 이것을 오래오래 간직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분을 사숙한 동문 아닙니까?”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가 폭격이 쏟아지던 도쿄에서 한국인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내어주며 한 말이었다.


“추사는 해외의 뛰어난 선비로 예전부터 높은 이름 들어왔네

높은 이름에는 비방이 돌아오니 문득 속세의 그물에 걸려버렸네

도도한 세상 풍속을 보라 선비의 맑음을 누가 알리오

저 송백처럼 타고난 성품이 굳고 바르니

한겨울 푸른 이 나무를 그려...” - 청나라 문인 반증위 -


전술했지만 추사의 [세한도]에는 조선시대 세 번째 소장자였던 김학준부터, 김정희 본인, 장악진, 오찬, 조진조를 비롯한 청나라 16명 문인의 명문장과, 우리 학자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등의 글이 함께 기록된, 그야말로 서(書)와 화(畵)가 집대성된 박물관과도 같은 위대한 작품이다.


1970년 이후 [세한도]도 딱 5차례밖에 전시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소장자와 지인들 등, 소수만이 [세한도]의 진품을 볼 수 있었고, 제주 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세한도] 역시 복제품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제 언제라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역사상 최고의 문인화 [세한도]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추사를 사랑한 모든 사람들의 상록수처럼 변치 않았던 헌신과 노고 덕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세한도] 관련 특별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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