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제주도에서 9개월간 나의 분신처럼 사용했던 LG 그램 노트북에는 아직도 제주도 성산읍의 날씨가 뜬다. 내가 지역 변경을 해야 하는 것 같은데 귀찮기도 했고, 또 언제라도 다시 제주도로 달려갈지 모르니 굳이 변경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서울 평창동에서 살고 있지만 모니터 상의 서귀포시 날씨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갑자기 추위가 찾아왔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어제 새벽에 너무 추위서 얼어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아직도 오리털 이불을 덮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얇은 이불로 바꿨다면, 어제 새벽에 ‘평창동 홀아비 피터팬 PD 동사(凍死)’, 뭐 이런 기사가 종로구 지역 신문에 뜨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그저께 밤에 동대문에서 대학 친구를 만나 과음을 했다. 월요일부터 코로나 방역이 2단계로 하향되었고, 그래서 밤 10시까지 친구와 술을 마셨는데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만큼 취해버렸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는 어찌어찌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동대문 어느 골목의 전봇대를 붙잡고 구역질을 하다가 셔터문이 내려진 어느 김치찌개 집 문 앞에 기대어 몇십 분인가를 졸다가 너무 추워서 ‘구미장’이라는 여관으로 기다시피 들어갔다.
사실 어떻게 여관을 찾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작년에 제주도와 순천에서 머물 때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끔 서울에 올라올 때면, ‘구미장 여관’에서 짐을 풀었던 기억이 나를 늦은 밤 그곳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여관 입구에서,
‘사장님 저 또 왔어요. 기억하세요 제주도 홀아비예요. 제가 지난여름에도, 또 지난 가을에도 여기 와서 묵었었잖아요. 사장님이 그때 저한테 아직 젊으니까 힘내서 살라고 얘기해주셨었는데... 설은 잘 쇠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
뭐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던 거 같다.
방 열쇠 키를 받아 쓰러지듯 침대에 엎어져서 잤는데, 내가 난방 조절을 안 했던 건지 이불을 덮지 않았던 건지 너무 추워서 계속 뒤척이다가, ’그래도 평창동의 따뜻한 내 집이 낫겠다...‘ 싶어서 새벽 5시 정도에 깨어 밖으로 나갔다.
새벽하늘엔 아직도 별들이 총총했고 부쩍 추워진 공기가 허연 입김을 만들어 냈다. 이제 2월을 넘겨서 그런 건지 새벽 5시의 서울 중심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밝았다.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서는 이미 아침 해가 밝아서 이곳 한양도성까지 여명의 빛이 비쳤던 건지, 아니면 방역단계가 2단계로 낮춰지면서 동대문 평화시장 주위의 상가 불빛이 불야성을 뽐내고 있어서 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이런 서울의 새벽 풍경 속에서 편도 5차선 도로에 서 있으니까, 내가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돌이 이방인의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만 1년. 제주와 순천에서는 늘 스스로를 타지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서울 평창동 월세집에 정착을 하고 나서는 비록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쉰세 살의 늙은 사내이지만 '서울 속의 이방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나는 여전히 가족을 떠나서 떠도는 이방인이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석 (1948)의 일부 -
신의주 남쪽(南新義州)의 유동(柳洞) 마을 박시봉의 방 (朴時逢方)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해방 뒤 만주에서 귀국한 백석이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8년에 발표한 시다.
일제강점기에 백석은 친구들에게, ’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오겠다 ‘는 말을 남기고 서울을 떠나 만주로 훌쩍 가버렸다. 당시에 백석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연히 만난 이화여고의 ’란‘이란 여학생을 애끓는 마음으로 짝사랑하다가,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허전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만주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마을을 떠돌았다. 백석의 젊은 날은 늘 이방인 신세였고, 허름한 여인숙에서도 적지 않은 시를 썼다.
하지만 만주와 함경도 그리고 신의주를 떠돌 때 쓴 백석의 시는, 동시대에 이미 청년 백석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라는 극찬을 듣게 하였다.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 백석 (1940년) 중에서 -
동대문의 추운 새벽 거리를 떠돌다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아 얼음골 같은 평창동 월세집으로 돌아온 나는, 겨울이지만 얼어 죽지 못하고 그렇다고 백석처럼 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시어를 조탁해 낼 수도 없는 무력한 나는, 그저 백석의 시를 읽는다.
이방인의 겨울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