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베 정권을 탄생시킨 무지함 -
베이징에서 난징, 다시 상하이를 거쳐 소주(쑤저우)와 황주(황저우)를 잇는 여정으로, 1999년의 3월을 보냈다. 소주와 황주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따로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지난 글에 이어 나를 ‘빡’ 치게 했던 일본 청년의 이야기를 적는다.
물론 중국 여행을 하는 대부분의 일본 청년들은, 멀쩡한 정신에, 다들 탐험 정신도 뛰어난 멋진 젊은이들 일거라고 믿는다. 다만 1999년 당시엔, 일본 열도에 ‘중국 실크로드 따라가기’ 같은 유행이라도 있었던 건지, 내가 가는 곳마다 일본 대학생쯤 보이는 청년들이 숙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들과 자주 교류를 갖게 되었고, 그중에 내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한국 사람 중에서도, 외국에서 현지 문화에 대한 낯섦으로 실수를 하거나, 또는 원래 성정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서 외국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많이들 알고 있듯, 중국 돈황(둔황)은 실크로드로 가는 관문으로, 당나라 때까지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던 오아시스 도시였다. 당시 번영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석굴사원 ‘돈황의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돈황 시가지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명사산 기슭에 있는데, 산비탈 암벽에 벌집처럼 500여 개의 석굴이 뚫려 있으며, (당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돈황 전체의 석굴은 1000여 개가 되나, 예술적 가치가 가장 높은 막고굴 지역의 석굴 외에, 나머지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불교가, 둔황에서 꽃 피운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고굴에서 발굴한, 가치를 메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5만여 점의 귀중한 문헌과 자료는, 최초 발굴자인 청나라의 도사 왕원록이 청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의 탐사대에 상당수를 팔아넘기는 바람에, 막상 중국 현지에는 6천여 점만 남아있다.
<중국 돈황이 막고굴을 찾아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
그럼에도 ‘돈황의 막고굴’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당(唐) 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의 일반 대중들까지 왜 그토록 중국의 막고굴에 열광했는지, 그 속사정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조선은 물론 중국 대륙까지 야욕을 뻗치고 있었다. 그래서 1911년 일본의 오타니 탐사대가 돈황 막고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여 많은 자료를 무차별 약탈해 갔고, 일본을 포함 당시에 프랑스와 미국 등도 막고굴에서 4만 5천여 점의 유물을 약탈해 갔는데, 이들 엄청난 양의 문서를 해독하기 위해서 일본 현지에 ‘돈황학‘이라는 학문까지 생겨났다.
게다가 일본 공영방송 NHK는 1986년 다큐멘터리 ‘대황하’를 일본 전역에 방영하면서, 일본 시청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일본 대중들은, 비록 막고굴이 중국 돈황에 있지만, 약탈해간 문서로 일본 현지에서 연구를 많이 해서, ‘돈황학’은 일본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고, 이런 이유로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많이 하고, 특히 막고굴을 찾아가서, 마치 막고굴이 자기 나라 유산이라도 되는 듯 깝친다.
돈황 근처에서 묵었던 숙소에는 한 방에 15개 정도의 침대가 있었는데, 나 빼곤 전부 일본인이었다. 어느 날은 다른 여행객들은 모두 현지 관람을 떠나고, 나와 어떤 일본 청년 둘만 방에 남게 되었는데, 녀석이 나에게 오더니, 막고굴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냐?’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라면서, 나름 막고굴에 대해서 공부한 티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막고굴은 여행자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된 동굴이 너무 적은 데다,
개방된 동굴의 벽화는 많이 훼손되어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중국에 오기 전에 인도에서 들렀던 아잔타, 엘로라 석굴은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고 막고굴처럼 불교 미술만 있는 게 아니라, 불교, 힌두 자아니교의 예술 작품들까지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어서 훨씬 큰 감명을 받았다"고도 대답했다.
그러자 그 일본인 청년은 내게 마구 화를 내면서, "막고굴이 세계 최고인데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석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다. 예술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막고굴이 어떤 곳이 알기나 하나? 너는 전혀 공부가 안돼 있다"며, 짧은 영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어쩌고 저쩌구 늘어놓았다.
그 녀석이 하도 흥분해서 얼굴은 홍당무가 되더니, 종국에 가서는 머리에서 물이 끓는 주전자처럼 김이 나오는 줄 알았다.
‘이.. 어린 눔이, 어따 대고, 너, 너 하면서 잘난 체야!
야 인마! 너 민쯩 까봐! 너 몇 살이냐?’
라며 귓방망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었다만, 녀석의 어깨가 나보다 더 튼실하고 떡 벌어진 게 보여서 참았다. ‘그래도 내가 갈고닦은 대한 남아의 태권도 실력이 녹슬지 않았는데, 이단옆차기로 녀석을 턱주가리를 날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긍지가 있지' 하며 그냥 그놈을 살려두었다. 녀석은 나 만나서 운 좋았던 거다. ‘내 대학 동기인, 건달 이종석 같은 애를 만났으면 넌 죽었어~~~ 인마‘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너 혹시 인도의 아젠타, 엘로라 석굴에는 가봤니?" 라고 물으니, 안 가봤단다. 관심도 없단다.
그래서 ’돈황 석굴은 며칠이나 관람했니?‘하고 물으니, 아직 안 갔단다. 내일 갈 거란다.
’왕앙아아아아앙 ~~~~~~~~‘
물론 나 역시, 막고굴에서 발굴된 문서만으로도, ’돈황 막고굴‘은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여행자가 직접 현지에 가보면 실망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일단 여행자에게 개방된 석굴의 개수가 제한적이고, 또 대중에게 공개된 대부분의 석굴 벽화는 훼손이 너무 심해서,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개방된 석굴의 벽화들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값진 유산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벽화의 수준에 그다지 높은 예술적 가치를 매기기엔 미흡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막고굴의 예술적 가치는, 전체 1000여 개의 석굴에서 하이라이트만을 편집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게 더 감동적일 수도 있다. 물론 다큐멘터리나 서적 등을 통해서 충분히 감동을 받은 사람이, 현지에 직접 가서 뜨거운 감명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인도와 네팔에 머물렀던 3개월 동안 들렀던, 인도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 주의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 ‘아잔타’에는 30여 개의 불교 석굴이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지어진 석굴들인데, 보존 상태가 돈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특히 석굴에 만들어진 불상과 벽에 조각한 부조들과 벽화는, 매우 유려하고 아름다워서 그 예술적 가치에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었다.
엘로라 석굴은 더 압권인데, 아잔타를 먼저 보고 엘로라 석굴에 가면 입이 떡 벌이지는 것을 넘어, 행복해서 쓰러져 죽을 정도이다. 엘로라(Ellora)에는 34개의 석굴이 있는데, 2k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특히 모래로 된 사암(砂巖)이 아닌, 단단한 바위산을 깎고, 뚫어 만들어서, 오랜 기간 잘 보존될 수 있었다. 5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완성되었고, 이 가운데 12곳은 불교 사원, 17곳은 힌두교 사원, 5곳은 자이나교 사원으로 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종교 예술의 백화점이라고 할 정도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16번 사원인, 카일라사(Kailasa) 사원은, 힌두교의 시바 신을 모시는데, 높이 90m, 너비 60m에 이르는, 하나의 큰 자연석을 조각하여 만든 대규모 석굴 사원으로, 그리스 아테네의 판테온 신전보다 약 두 배 정도 크다.
<인도의 엘로라 석굴을 찾아가면 높이 90미터라는 엄청난 크기에도 압도당하지만, 미시적으로 들여다봐도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상들 때문에 또 다시 놀라게 된다>
765년경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100년의 건축 기간이 소요됐는데, 고고학자들은 건축 당시 바위를 조각하고 남은 파편이 20만 톤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더구나 사원의 내부와 외부는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예술 작품들을 보고 죽을 수 있다니, 죽어도 아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그 일본 청년은 왜 내게 화를 냈던 걸까? 자신이 책에서 읽고 공부한 것과 내 말이 다르니까 화가 난 걸까? 아니면 한국인은 문화와 예술에 무지할 거라고 생각하고 나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사는 이탈리아계 마피아를 다룬 영화를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1,2부]와, 봉준호 감독도 존경한다고 말했던 마틴 스콜세이지의 [카지노],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같은 영화는, 몇 번을 돌려 봤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갱단의 폭력이 넘쳐나는 영화’는 싫어해서 안 본다는 사람을 만나도 그를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각자의 취향과 견해가 다를 수 있으니까. 나와 시각이 다르다고, 타인을 무지하다며 비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우리나라에 터무니없는 경제보복 조치를 하는 등,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나라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을 오랜 기간 동안 보여왔다. 20여 년 전, 내가 중국 돈황에서 만났던 일본 청년은, 지금은 마흔이 넘었을 거다. 그 청년이 젊은이의 객기에서 벗어나, 더 성숙한 성인이 되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일본의 중년들이, 아베 정권을 탄생시킨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