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이 된 가장들을 위한 노래
-[내 사람이여] / by 이동원
서울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는 필자가 살고 있는 평창동에는 저녁 7시를 넘기면서 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3월의 첫날 함박눈이 내리다니 낯설기도 했지만, 2020년의 겨울을 보내는 건 이 계절도 못내 아쉬웠나 보다.
일요일인 오늘은 찬비와 함박눈이 내렸지만, 어제 토요일은 완연한 봄이었다. 낮 기온은 15도가 넘게 올라갔고 날씨도 맑아서, 대학 동기 2명과 함께 서대문구에 위치한 '안산'에 올랐다. 서대문 형무소 뒷길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서울 안산의 둘레길은, 나무 데크가 잘 조성되어 있고, 그리 높지 않은 정상에는 평안도로부터 올라온 봉화를 남산으로 보냈던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남아 있고, 과거엔 무악산으로도 불렸다. 정상에 오르는 길이 비교적 평이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단위의 등반이 많은 곳이다.
지난 토요일엔 대학 동기 2명과 함께 안산에 올랐지만, 필자가 아내와 이혼을 하기 전에는 주말에 두 아들을 데리고 안산을 종종 오르곤 했었다. 갑자기 찾아온 푸근한 봄 기온에 가족단위로 안산을 찾은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몇 해 전 모습을 찾을 수도 있었다.
<지난 토요일 (2월 28일) 서대문구 안산(=무악산)에서 바라본 맑게 개인 서울의 전경>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고, 그 어린 아들보다 더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던 꼬꼬마의 오빠도 보였다. 이 역시 나의 두 아들과 함께 안산과, 북한산 둘레길을 자주 다녔던 5~6년 전 나와 내 가족의 모습이기도 했다.
안산 봉수대 정상을 앞두고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전경을 보며, 쪽두리봉부터 비봉, 사모바위, 문수봉,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을 자녀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자상한 아빠의 모습도 보였다. 따사로운 봄의 풍경이었다.
필자의 처지와 같은 홀아비의 눈에는 유난히 더 단란한 가족이 모습이 잘 뜨이는 건지, 지난주에 들렀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우리 선조들의 유산 앞에서 자녀와 함께 다양한 역사 지식을 얘기하던 젊은 부모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었다.
가만히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비록 나의 시선은 조선시대의 달항아리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쏠려있었다.
“혁재야 이거 봐봐 이 도자기는 아까 봤던 것하고 다르지 않니? /
응, 색이 더 예쁜 거 같아! /
그래, 조선시대의 백자가 담백하다면, 고려시대의 청자는 화려하구나~”
나 역시, 나의 어린 두 아들과 미술관과 박물관에 자주 들러, 예술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나 스스로 나름 자상하고 좋은 아버지인 거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돌아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 자상한 아버지였다. 정작 아이들이 하고 싶어 했던 것들은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만큼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었다.
비 오는 오늘 일요일 오후엔 대학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찾아왔는데, 그도 가족과 소통이 부족했었음을 고백했다. 회사에서는 대기업이 임원으로 있지만, 집안에서는 아내와 두 딸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아빠일 뿐이라고. 본인이 소통이 부족한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일요일은 쉰 살의 가장들이 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탈출하기 좋은 날이기라도 한 건지, 대학 동기 다른 두 명도 마침 종로 낙원상가 근처에서 막걸리와 빈대떡을 먹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후배와 나는 자리를 옮겨 넷이 함께 모였는데, 대학 동기중 또 다른 한 명도, 집에서 자신이 투명인간 임을 고백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가사, '바보 같지만 바보 같지만 / 나는 정말로 보낼 수가 없어'라는 가사로 유명한 김범룡의 [겨울비는 내리고]가 떠올랐던 지난 일요일의 비 오는 익선동 >
대학을 졸업하고, 군 제대를 하고, 스무 살 후반부터 본인의 성공과 가족을 위해서 20년 이상을 열심히 살다가 쉰 살이 넘은 우리들은, '왜 가정에서는 실패한 가장'일까? 우리들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했을까? 우리는 왜 가족에게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지 못했을까? 나는 투명인간 초기에 나의 상처 받은 자존심을 어쩌지 못하고 서울 집을 뛰쳐나와 제주도에 숨어 버렸다. 반면 대학 후배와 동기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 헤어질 수 있느냐?”
"이런 시기는 다 지나가기 마련"
이라고 했다.
최근에 [왓챠]라는 스트리밍 영상 콘텐츠 서비스를 통해서 [코요테]라는 미드를 보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 속 주인공 남자는 평생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수비대 일에만 충실하다가 아내와 딸에게 버림을 받은 남자이다. 주인공 남자는 스스로 나쁜 아빠와 불성실한 남편이 이었다고 고백하는데,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직장과 가정 두 곳에서 다 자신의 역할을 잘한다는 건, 너무도 버거운 책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필자처럼 결혼생활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부부 사이의 위기도 지혜롭게 넘기도, 자녀들에게도 존경받는 훌륭한 아버지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와 함께 주말에 모이는 지인들은, 왜 그리 칠칠치 못한 아비로 투명인간이 되었을까?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20대의 뜨겁던 청춘과, 30대의 단란한 가정, 40대의 안정과 실패, 그리고 50대의 힘겨운 시간을 애써 버텨내며 살아왔을 뿐인데...
친구들은 50대 가장들이 불쌍하다면서, 서로의 신세 한탄을 하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다가도 결론은,
"아무리 그래도,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잘하자"
"까딱 잘못했다가는, 피터팬처럼 쫓겨나서 홀아비 신세된다" 라면서.
친구들아 후배들아~
내가 1년을 혼자 살아보니,
쉰 살이 넘은 남자가 외로움이라는 빈 공간과, 허무함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더구나.
오늘은 함박눈이 내렸지. 하지만 겨울은 지날 것이다.
새 희망을 안은 따사로운 봄바람이 다시 불어오겠지.
내가 사랑하는 지인들의 가정에도 다시 봄바람이 불어오길 바란다.
<1984년에 발표한 이동원의 다섯 번째 솔로 앨범.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라는 가사로 유명한 [이별노래]가 수록되어 있었던 이 앨범에는, 아름다운 사랑 노래 [내 사람이여]도 수록되어 있다 >
지인들과 지인들의 가족을 생각하면서, 피터팬 PD의 음악 칼럼 <음악이 흐르는 풍경>에서 오늘 듣고 싶은 노래는 [내 사람이여]이다.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
음 눈물이 고인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가난한 삶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
이 노래는 원래 포크 가수 이동원이 1984년에 다섯 번째 솔로 앨범에서 발표했었다. 이후 김광석도 리메이크를 했었고, MBC 예능 [나는 가수다]에서 YB밴드가 부르면서 다시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눈 내리는 3월 초, 우리 투명인간들은 무엇을 바랄까?
PS.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의 [내 사람이여]는, 1984년에 전문 노래패 '노래마을'을 세우고, 우리가 점점 잊어가는 소중한 가치와, 사랑, 그리고 통일과, 사회문제에 관한 노래를 발표했던 백창우가 작사 작곡한 노래이기도 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0년 3월에 발매한 백창우의 데뷔 앨범은, 백창우에게 '제2의 김민기'라는 타이틀을 안겨주기도 했는데, 이 앨범 속 <바람>이라는 노래는 이화여대 체육대회 때 응원가로 처음 불리면서, 농활 운동가로 애창되기도 했다. 이후 운동권 학생들이 구전가요처럼 부른 이 곡은 <새 농민가>로 널리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