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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Jun 10. 2021

H에게...

-너무 늦었지만, 사과를 하고 싶네...-

H 부장!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오랜 기간 회사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서, 자네가 MBC에서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자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부서 직원들의 신임을 받으면서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 같네.


하지만 얼핏 듣기로 회사의 경영상황은 작년까지는 매우 어렵다고 들었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고,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들이 막대한 자본으로 공격적인 시장 확장 정책을 폈고, tvn와 jtbc 등 비교적 신설 채널들이 자네 회사의 시장 점유율을 많이 잠식했다고도 들었네.


하지만 올해부터는 광고시장도 많이 나아졌고, 특히 SBS가 공시를 통해서 좋은 경영성과를 보고 한 것을 보면 MBC 역시 경영상황이 많이 호전되고 있으리라 믿네. 특히 H 부장처럼 능력도 있으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넘치는 직원들이 MBC에는 많이 있으니, MBC가 어려운 시기를 잘 헤쳐가고 있으리라 믿네.      


H 부장!

아마도 자네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너무도 오랜만에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 말을 꺼내자니, 많이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자네에게 이런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지난 2년 동안 자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네. 그리고 나로 인해서 큰 상처를 받았던 자네와 자네 부서 직원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전달하는 게 자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거 같고, 또 나 자신에 대한 위안도 된다고 판단했네.     


우선, 2여 년 전 내가 자네 부서와 부원들에게 했던 잘못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네.      

당시에 MBC 라디오본부의 부장으로 재직했던 나는 상당히 오만한 사람이었고, MBC 경영본부의 콘텐츠 판매 전략에 대해서 매우 큰 불신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네. 그래서 부서장들이 모이는 공식 업무 회의에서 자네 부서의 부원들에게 적절하지 않은 비판을 쏟아냈고, 그로 인해서 회사는 내게 중징계를 내렸고 나는 보직에서 사퇴하게 되었었지.     


당시의 나는 상당히 고집불통에다가 오만불손하기도 한 사람이었기에, 나를 징계해 달라는 사무연락에 자네의 이름이 있는 걸 보고 자네를 많이 미워했었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네.      


흔히 주인이 없는 회사라고 많이들 말하는 MBC라는 공영방송국의 콘텐츠 판매 전략과 관련해서, 자네와 자네 부서의 직원들이 부단히 노력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헌신적으로 일해왔다는 점에 대해서 당시의 나는 간과하고 있었네. 


하지만 회사에서 중징계를 받고 나서도, 나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던 K 등의 직원들에게 나는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하였네.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는 메일을 몇 차례 보내서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야 말았네. 이와 같은 나의 잘못에 대해서 내가 크게 후회하고 있고, 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네와 당시의 자네 부서 직원들에게 전하고 싶네. 

      

H 부장! 

돌아보면 자네는 MBC 라디오본부에서 일할 때도 좋은 후배이자 유능한 라디오 PD였네. 자네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신선한 시도를 많이 했었는데, 자네의 그런 뛰어난 연출을 볼 때, 나는 선배 PD로서 내가 더 노력하면서 일해오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 부끄럽기도 했고, 자네의 참신한 시도들이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했었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기억 중의 하나는, 자네와 같이 진행했었던 행사 중에, 여름이면 서울 한양대 캠퍼스에서 개최했었던 [MBC FM 여름 음악 페스티벌]이네. 수년 동안 진행했던 그 행사를 MBC 라디오본부가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초기에 한양대 캠퍼스로 장소를 선정하고, 매해 수 만 명의 관객으로 가득 찼던 대형 콘서트의 초기 콘셉트를 잡는 것과 관련해서, 자네가 보여줬던 공연 연출가로의 뛰어난 역량이었다고 믿네.      


자네가 연출을 맡았던 날의 공연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며 행복해하던 객석의 관객들처럼, 나 역시 매우 즐거웠었고 과거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놀라웠었네. 판에 박힌 듯한 라디오 공개방송을 훨씬 뛰어넘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던 자네와 자네 스태프들의 역량에서 나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네.      


H 부장!

하지만, 공영방송 MBC에서 일했던 우리들에게는 질기고도 아픈 운명이 예정돼 있었던 건지, 그토록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만이 있지는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나 역시 많이 안타깝게 생각하네. 자네에게 내가 처음으로 마음의 앙금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박근혜 정권 시절 내가 현업에서 쫓겨나서 핍박을 받고, 자네는 나의 관리 부장으로 상부의 지시를 이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때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이 역시 자네의 잘못은 아닐 듯하네. 10여 년이 지난 그 시절의 일들을 지금에서야 다시 떠올려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택을 자네도 역시 했던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내가 옳다고 판단했던 것을 따랐던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이후 정권이 바뀌고 자네가 경영파트로 가서 일을 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자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자네를 대했다고 생각하네. 그런 와중에 자네와 자네 부서의 직원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1년의 휴직 뒤에 회사를 떠나게 되었네. 


H 부장!

그렇게 회사를 급하게 떠나면서 자네와의 불편했던 앙금은 결국 해소되지 못했고, 거의 10여 년 만에 자네에게 이렇게라도 말을 전하게 되었네. 이런 글을 쓴다는 게 내게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마음이 많이 불편했지만 언젠가는 자네와 이런 불편한 감정을 다소라도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처음에 글을 시작할 때의 마음과는 달리 막상 글을 쓰다 보니, 자네에게 진심 어린 사과도 하지 못했고, 또 MBC 라디오 PD들이 함께 나눴던 행복했던 추억들도 제대로 풀어놓지 못한 듯하네. 오늘 쓰는 글이 자네에게 처음으로 해보는 사과이고, 또 박근혜 정권 시절을 포함해서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네에게 사적으로 말을 걸다 보니 어떻게 얘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던 듯하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네. 

나와 큰 갈등을 빚었던 당시는 물론 지금도, 자네와 자네 부서의 직원들은 MBC라는 공영방송을 위해서 또 구성원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었고, 또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다고 믿네.      


나는 이젠 회사를 떠난 사람이라서 MBC 못지않게 넷플릭스와 tvn 등의 타 채널도 아끼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MBC가 과거에 국민들에게 많은 기쁨과 행복을 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네. 그리고 자네와 같은 유능한 직원들이 그 중심에 있기를 바라네! 


건승을 비네. 


<필자는 MBC 라디오에서 25년 동안 라디오 PD로 재직했고, 지금은 서울의 작은 동네에서 글을 쓰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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