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와 공(空)-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붉게 물든 황혼이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감싸 안았다.
산 위 작은 암자, 아무도 찾지 않는 고요한 숲속. 그곳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붉은 법의를 두른 채 연꽃 위에 앉은 부처.
그리고 그 앞, 망토를 두르고 독수리의 눈빛을 지닌 철학자 니체가 서 있었다.
“당신이 바로 고통을 끝내는 길을 설파했다는 석가모니입니까?”
부처님은 고요한 미소로 답한다.
“나는 단지 중생에게 본래의 자성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네.”
니체는 천천히 걸터앉았다. 바람이 그의 수염을 스쳤다.
“나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영원회귀’와 ‘초인’을 설파했지요.
허무의 심연에서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하셨죠. 과연 ‘공’이란 무엇입니까?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입니까?”
부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即是空 空即是色.”
“형상은 곧 공이며, 공은 곧 형상이네.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네. 고정된 자아도, 영원한 본체도 없네.
그러니 붙잡으려 하지 말게.”
니체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했지요.
‘너희는 아직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부정이 아니라 삶의 긍정을 말한 것이다.’
당신의 ‘공’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하지만, 그 자체로 긍정인가요?”
부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은 모든 가능성의 자리일세. 고정된 자아, 집착, 개념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깨어있는 지혜인 반야(般若)가 깃들게 되지.
그리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無得 (무득) 無罣礙 (무괘애) 無有恐怖 (무유공포)
遠離顛倒夢想 (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 (구경열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으며,
뒤바뀐 헛된 꿈에서 멀어져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
니체는 손으로 턱을 짚었다. 그에게 '무득(無得)'은 생소한 언어였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얻기를 원합니다.
권력, 생명, 의미... 나는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의 의지’를 말했어요.
그 욕망은 삶의 본질입니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없앤다면
인간은 허무 속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욕망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네. 다만, 그 욕망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지.
그대가 말한 ‘초인’도 결국 기존의 도덕을 넘어서는 자 아닌가?
반야심경은 그런 틀 자체가 허상임을 간파하라고 말하네. 모든 분별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니체의 눈이 빛났다.
“당신은 마음의 그림자까지 들여다보는 자로군요.
하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초월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고통은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승화해야 합니다.”
부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성제, 고성제(苦聖諦)일세.
삶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일으키는 집착의 원인을 보고, 그것을 걷어내는 것이 해탈이지.”
‘고진멸도 苦集滅道’ —《초전법륜경》
“그대는 고통과 싸웠고, 나는 고통을 이해하려 했네. 다르지만 닿아있지 않나
?”
니체는 피식 웃었다.
“나는 반神적 전통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 신을 죽였고,
당신은 아예 고정된 실체로서의 신을 말하지 않지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사라질 뿐.
그것을 깨달으면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되지.”
‘무아 無我’ —《숫타니파타》
니체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내 말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부처님은 맑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참된 ‘자신’이란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깨어 있는 마음이지.
그대가 진정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의지조차도 ‘비어 있음’을 알고 깨어서 바라보게.
그때 비로소 그대는 진정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네.”
둘은 말없이 황혼을 바라보았다.
말보다 더 많은 대화가 침묵 속에서 오갔다.
니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내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던지도 모르겠군요.
그대는 그림자까지 품고 비우는 길을 걸었지요.”
부처는 조용히 합장했다.
“그리고 그대는 그림자를 직시하고, 넘어서는 힘을 길렀네.
우리의 길은 다르지만, 도착지는 크게 다르지 않네.”
밤이 내려앉았다. 별이 빛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의 모습은 고요 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한 사람은 공을 말하고, 한 사람은 의지를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하나의 침묵 안에서 서로를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