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마음을 벼리고 세계를 비추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일 색으로 나를 보고,
소리로 나를 찾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삿된 길을 걷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다.”
이 구절은 『금강경』에서 가장 날카로운 통찰 중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
귀에 들리는 말,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
이 모든 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진짜를 볼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나’는 곧 ‘여래(如來)’를 뜻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여래’는 곧 우리 안의 본성,
존재의 본질,
삶의 진실한 중심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곧
“너 자신을 겉모습으로 보지 말고,
타인을 겉으로 판단하지 말며,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말투, 외모, 직업, 재산, 명함, 학벌, 인맥…
그런데 『금강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색(色)이요,
그 모든 것은 음성(聲) 일뿐이니,
그것에 머물면 ‘여래’를 보지 못한다.”
쉽게 말해,
진짜를 보려면 껍질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항상 말이 많지 않고,
항상 잘 꾸미지 않으며,
항상 자신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보다 마음이,
모양보다 깊이가,
빛보다 그림자가
그 사람을 더 정확히 말해줄 때도 있습니다.
‘여래(如來)’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여래를
우리는 자꾸 어떤 형상으로 떠올리려 합니다.
부처님의 동상, 경건한 표정, 조용한 말투, 청빈한 옷차림…
하지만 금강경은 말합니다.
“그것조차 ‘상’에 불과하다.”
여래조차 형상으로 찾으려 하면,
그건 삿된 길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특정한 모습이나 사람, 장소에만 있다고 여기는 순간,
진리는 당신 손에서 멀어진다.”
진리는 성당에만,
사찰에만,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이의 눈빛 속에도,
이웃의 친절한 말 한마디에도,
혹은 스스로의 실수 앞에서 깨어나는 자각 속에도
‘여래’는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타인의 겉모습에 머물지 않기
외모, 직업, 말투가 아닌
그 사람의 눈빛, 태도, 숨은 이야기를 보려 노력해 보세요.
2. 나 자신을 특정 이미지로 규정하지 않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한 번 망했으니 끝이야.”
이런 ‘색으로 보는 나’에서 벗어나세요.
3. 진실은 말보다 행동에서 본다는 걸 기억하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있는 진심,
행동 속의 조용한 울림이
진짜입니다.
4. 깨달음을 외부에서 찾지 않기
부처님은 말했습니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은
그 사람의 겉모습을 벗기고 나서입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아픔, 희망, 갈망, 실수를 함께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여래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금강경』은
삶을 조용히 응시하게 만듭니다.
드러난 것을 믿지 말고,
사라진 것 속에서 본질을 찾으라고.
그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누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멈추는 마음.
그 침묵 속에서
여래는 슬며시 고개를 내밉니다.
다음 편에서는
『금강경』이 우리에게 건네는 또 하나의 도전,
‘말에 의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왜 언어가 진리를 가두고,
어떻게 그 너머를 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