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아랍 6.
기억의 전쟁, 땅의 전쟁

문명의 충돌과 국가의 운명

by 이안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상처

소크라테스와 레비스트로스의 대화로 살펴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철학적 뿌리


등 장 인 물

소크라테스 — 존재의 의미와 공동체의 정당성을 묻는 고대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기억과 신화를 구조로 분석하는 현대 인류학자


장소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사해 근처. 붉은 석양이 사막의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다.
두 인물은 황량한 정착촌의 언덕 위에 앉아있다.


소크라테스:
레비스트로스여, 우리는 지난 대화에서 민족과 국가는 ‘상상의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했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자네에게 가장 괴로운 질문을 해야겠네.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팔레스타인의 것인가, 이스라엘의 것인가?


레비스트로스:
그 질문은 결국 ‘기억의 귀속’을 묻는 것이지요.
이 땅은 단지 점유의 대상이 아니라,
'누가 이 땅을 더 깊이 기억하고, 더 절박하게 소유를 상상해 왔는가'의 문제입니다.


소크라테스:
허면, 이 땅을 둘러싼 분쟁은,
총과 탱크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충돌이라는 말인가?


레비스트로스: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의 상처 속에서
이 땅을 ‘약속된 땅’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율법, 출애굽기, 예언자들의 말속에
이곳은 ‘귀환’의 종착지로 자리 잡았지요.


하지만 팔레스타인에게도 이 땅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추방된 기억의 뿌리’입니다.

1948년 나크바(Nakba, 대재앙) 이후,
그들은 조국을 빼앗기고, 기억 속에 고향을 봉인해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이 갈등은,
서로 다른 ‘신화의 구조’가 같은 공간에 덮인 결과라는 말이로군?


레비스트로스: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나는 ‘귀환의 약속’을 신화화했고,
다른 하나는 ‘추방의 트라우마’를 신화화했습니다.
신화가 역사보다 오래가고,
기억이 지리보다 깊은 법이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정복의 전쟁이 아니라,
‘기억을 누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의 전쟁인가?


레비스트로스:
그렇습니다.
현대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자신의 기억을 세계에 전달할 수단이 봉쇄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도, 군대도, 강력한 외교망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기억은 종종 “테러”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버리곤 하지요.


소크라테스:
슬프도다.
이런 조건에서 팔레스타인은 결국 폭력이라는 언어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
그렇습니다.
들리지 않는 기억은, 때로 파편으로라도 말해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또한,
생존을 둘러싼 기억과 공포 속에서
철저한 군사적 방어의 체계를 ‘정체성’으로 흡수해 왔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
이 전쟁에 해답은 없는가?
이들이 다시 함께 살 수는 없을까?


레비스트로스:
해답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의 전쟁’이 아니라,
기억의 구조를 서로 인정하고,
서로의 신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재편하는 문화적 번역의 노력_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한때 아슬로와 바르샤바, 베이루트와 하이파에서
이들이 함께 살았던 기억은 존재했지요.
그러나 그 기억은 지워졌고,
이제 신화를 누가 더 오래 주장하느냐의 전쟁이 남았습니다.


맺음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신화의 충돌입니다.
총은 이 충돌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
해결책은 사유의 전환에서만 나옵니다.


디아스포라와 나크바는
서로 대립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에 상처받은 기억 구조로 읽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땅은 계속해서 울 것이며,
우리는 그 울음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상처

소크라테스와 레비스트로스의 대화로 살펴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철학적 뿌리




등 장 인 물

소크라테스 — 존재의 의미와 공동체의 정당성을 묻는 고대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기억과 신화를 구조로 분석하는 현대 인류학자



장소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사해 근처. 붉은 석양이 사막의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다.

두 인물은 황량한 정착촌의 언덕 위에 앉아있다.




소크라테스:

레비스트로스여, 우리는 지난 대화에서 민족과 국가는 ‘상상의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했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자네에게 가장 괴로운 질문을 해야겠네.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팔레스타인의 것인가, 이스라엘의 것인가?




레비스트로스:

그 질문은 결국 ‘기억의 귀속’을 묻는 것이지요.

이 땅은 단지 점유의 대상이 아니라,

'누가 이 땅을 더 깊이 기억하고, 더 절박하게 소유를 상상해 왔는가'의 문제입니다.




소크라테스:

허면, 이 땅을 둘러싼 분쟁은,

총과 탱크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충돌이라는 말인가?




레비스트로스: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의 상처 속에서

이 땅을 ‘약속된 땅’으로 해석해왔습니다.



율법, 출애굽기, 예언자들의 말 속에

이곳은 ‘귀환’의 종착지로 자리잡았지요.




하지만 팔레스타인에게도 이 땅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추방된 기억의 뿌리’입니다.


1948년 나크바(Nakba, 대재앙) 이후,

그들은 조국을 빼앗기고, 기억 속에 고향을 봉인해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이 갈등은,

서로 다른 ‘신화의 구조’가 같은 공간에 덮인 결과라는 말이로군?




레비스트로스: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나는 ‘귀환의 약속’을 신화화했고,

다른 하나는 ‘추방의 트라우마’를 신화화했습니다.

신화가 역사보다 오래가고,

기억이 지리보다 깊은 법이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정복의 전쟁이 아니라,

‘기억을 누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의 전쟁인가?




레비스트로스:

그렇습니다.

현대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자신의 기억을 세계에 전달할 수단이 봉쇄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도, 군대도, 강력한 외교망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기억은 종종 “테러”라는 단어로 번역되어버리곤 하지요.




소크라테스:

슬프도다.

이런 조건에서 팔레스타인은 결국 폭력이라는 언어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

그렇습니다.

들리지 않는 기억은, 때로 파편으로라도 말해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또한,

생존을 둘러싼 기억과 공포 속에서

철저한 군사적 방어의 체계를 ‘정체성’으로 흡수해왔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

이 전쟁에 해답은 없는가?

이들이 다시 함께 살 수는 없을까?




레비스트로스:

해답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의 전쟁’이 아니라,

기억의 구조를 서로 인정하고,

서로의 신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재편하는 문화적 번역의 노력_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한때 아슬로와 바르샤바, 베이루트와 하이파에서

이들이 함께 살았던 기억은 존재했지요.

그러나 그 기억은 지워졌고,

이제 신화를 누가 더 오래 주장하느냐의 전쟁이 남았습니다.




맺음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신화의 충돌입니다.

총은 이 충돌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

해결책은 사유의 전환에서만 나옵니다.




디아스포라와 나크바는

서로 대립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에 상처받은 기억 구조로 읽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땅은 계속해서 울 것이며,

우리는 그 울음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전 05화이스라엘과 아랍(5),  미국은 누구의 편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