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로부터의 대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범죄소설이자 철학적 우화다.
자연을 사랑하고 별자리를 읽는 노년의 여성 야누이나는,
자신의 주변에서 동물 학대와 인간의 폭력이 반복되는 것을 목격한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침묵 대신 분노를 선택한다.
이 작품은 분노를 죄로 보지 않고,
윤리적 감각의 시작으로 그려낸다.
야누이나는 말한다:
“나는 내 분노를 믿는다.”
오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는, 자신 안의 억눌린 분노와 정의감에 대해,
올가에게 천천히 묻는다.
제제:
올가, 가끔은 나도 너무 화가 나요.
누가 약한 친구를 괴롭히거나,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그런데 화내면 나쁜 아이라고 해요.
정말 그런가요?
올가:
아니야, 제제야.
화를 낸다는 건 너의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야.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야누이나도
세상의 부조리에 화를 냈지.
그녀는 분노를 통해
자연과 정의의 목소리를 대신했어.
문제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화가 어디로 가는 가야.
그것이 파괴가 아니라
시가 될 수 있다면,
그건 나쁜 게 아니라 용기란다.
제제:
어른들은 항상 말해요.
“화를 내지 마.”
“좀 참아.”
왜 어른들은 분노를 숨기라고 하는 걸까요?
올가:
그건, 제제야,
어른들이 두려움을 배운 탓이야.
분노는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고,
권위에 도전할 수도 있지.
사람들은 조용한 아이를 원하고,
순응하는 시민을 원해.
하지만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서
야누이나는 말해.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너무 조용한 거야.”
분노를 숨기라는 말은,
사실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두려움일지도 몰라.
제제:
저는요,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봐요.
친구들 사이에서 틀린 걸 지적하면
제가 외톨이가 돼요.
정의로운 마음은 왜 이렇게 외로울까요?
올가:
그건, 제제야,
정의는 언제나 먼저 깨어나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야.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서
야누이나는 마을에서 혼자가 되었지.
동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녀를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했어.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어.
진실은 가끔
먼저 깨어난 자의 외로움을 요구한단다.
그건 슬프지만,
아름답기도 해.
제제:
고양이 밥을 준다고 놀림을 받은 적 있어요.
벌레를 살려준다고 친구들이 웃었어요.
왜 약한 걸 도우면 이상한 아이가 되는 걸까요?
올가:
왜냐하면, 제제야,
세상은 아직도 강한 걸 예뻐해.
힘 있고, 소리 크고, 경쟁에 이긴 걸 좋아하지.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그런 세상을 거꾸로 보게 해.
야누이나는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기억했고,
그 기억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지.
약한 존재를 지키는 건
세상이 잊은 가장 오래된 윤리야.
그러니 웃음을 두려워하지 마.
너는 옳은 걸 하고 있는 거야.
제제:
그럼요, 올가.
분노도 사랑일 수 있나요?
사랑하니까 더 아프고,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걸까요?
올가:
그래, 제제야.
가장 깊은 분노는 사랑에서 태어난단다.
야누이나는 동물을 사랑했기에
사람의 무관심에 분노했지.
그녀의 분노는 세상을 바꾸려는 몸짓이었어.
그래서 분노는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야.
사랑이란, 세상이 이렇게는 안 된다고 말하는 용기란다.
이 작품은 폴란드적 고전 형식의 추리소설을 변형하여,
여성적 분노와 생태윤리를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주인공 야누이나는 사회의 언어를 믿지 않고,
자신의 별자리와 감각을 따르며 사건을 추적한다.
작품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그것은 과거의 죄 위에 새로운 윤리를 세우겠다는 선언이다.
올가는 말한다:
“분노는 정의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파괴가 아니라 시가 된다.”
오늘 제제는
자신의 분노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고,
우리는 분노를 품은 사랑이
세상의 가장 낡은 벽을 어떻게 흔드는지를 함께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