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종합 영어]와 <라붐>의 '소피 마르소'
-서울 단대부고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
미국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키우시는 페이스북 친구분께서 어제 [성문 종합 영어] 구판의 사진을 올리셨다.
그 친구분께서는 사진과 함께,
“누가.... 이 책을 아시는 가요???
만나서 커피 한잔 하실래요???”
라는 멘트를 적으셨는데, 물음표를 3개씩이나 적으신 걸 보니, 미국에 사시는 교포 중에는 영어에 능통한 분들이 많을 테니, [성문 종합 영어]의 명성을 아는 분들이 적어서 찾기 어려운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아니면 이 책에 관한 추억이 필자처럼 너무 사무치다 보니, [성문 종합 영어]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고 싶은 분을, 간절히 만나고 싶으신 걸지도...
전술했지만 피터팬 PD에게도, 송성문 선생이 저술하고 성문출판사에서 나온, [성문 종합 영어]에 관해서는 단편소설을 한 편 쓸 정도의 사연이 있다. 고2였던 1986년부터 시작해서, 34년이 지난 2020년 지금까지도 이 책을 애독하고 있으니까, 내 생의 2/3를 이 책과 함께 보냈고, 물론 제주도에서 혼자 사는 지금도 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이다.
<피터팬 PD의 페이스북 친구분이 포스팅하신, 옛날 판 [성문 종합 영어] 표지. 아! 옛날이여~ 아직도 비닐 표지가 멀쩡하다니 정말 책 깨끗하게 보셨음^^. >
왜 이 책을 이렇게 애정 하냐고?
글쎄? 34년 동안 봐왔지만, 나도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착각을 자주 하게 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책도, 다시 읽으면 그 책을 처음 읽었던 설레던 순간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런데 많은 책중에서도 유별나게 [성문 종합 영어]는, 표지만 봐도 서울 대치동에 위치한 모교 단대부고에 다녔던, 힘들었지만 소중하면서도 아쉬웠던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세월로, 빨려 들어가듯이 나를 데리고 간다.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일탈의 욕망은 강했고, 이루고 싶은 꿈은 많았으며, 푸른 꿈에 도취해 하늘의 별이라도 딸 것처럼 홍조를 띠다가, 날개가 녹아버린 이카루스처럼, 금세 창백한 얼굴로 추락해 버리고 마는 하루하루가 반복됐었다.
꼭 바라고 원망하던 소원을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것들은 가슴에만 묻어둬야 했으며, 또 그런 망설임 때문에 꼭 해야 할 학업이나 교우관계도 제대로 못하기 일쑤였다. 모든 게 금세 부서질 것처럼 허약했고, 하지만 위태롭기 때문에, 그 찰나의 모든 순간이, 단대부고로 올라가는 아침 등굣길에 서있던 가을 나무들의 단풍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소중하기도 했었다.
그런 와중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피터팬 PD는, 성당에 계속 열심히 다니다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부님이 돼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고등학교 3년 내내 했었다. 그래서 학교 공부는 늘 2순위였다. (물론 서울대에 못 간 사람들이 꼭 이런 핑계로, 공부 안 했던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필자가 1985년에 입학했던 서울 대치동에 위치한 단대부고. 졸업하고 거의 처음으로, 모교의 사진을 보는데, 운동장과 그 옆의 돌계단, 그리고 여름의 햇볕을 가려주던 고마운 나무들이 그대로 있다! 사진엔 안 보이지만, 맞은편 농구대도 그대로 있을까?? >
그런데 신부님을 꿈꾸던 그 순결한 시절에, 어느 날 훅,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프랑스 영화 [라붐]의 청순한 여자 주인공이었던, '소피 마르소'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파리에 살고 있는 그녀는, 유럽의 많은 사람들처럼 가톨릭 신자일 가능성이 높아서, 종교적인 이유가 우리의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의 열렬할(?) 사랑에 가장 큰 문제는, [성문 종합 영어]와 [수학의 정석]따위를 매일 끼고 살아야 했던, 나의 존재에 대해서 그녀가 전혀 몰랐다는 거였다.
말주변이 없어서 친구들 앞에서도 수줍수줍하던, 대한민국 서울 단대부고에 다니던 까까머리의 순결한 고등학생의 존재를 말이다. (지금도 의구심이 드는 게 있는데, 아마도 그녀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파리에서 서울로 전용기를 타고 날아오지 않았을까? 동양적인 매력이 있던 그녀는 일본과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아서, 일본 도쿄에까지는 팬서비스를 위해서 왔다는 소식을 [스크린] 같은 잡지에서 보기는 했었다.)
소피 마르소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신부님이 되는 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파리에 가서 꼭 소피 마르소랑 결혼을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소피 마르소가 나의 가슴속에 가득 자리하고 있었으면서도, 인근의 숙명여고나 진선여고의 예쁜 여학생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뛰는 건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걸 보면, 피터팬 PD는 타고난 '희대의 바람둥이'임이 틀림없는 거 같다.
신부님이 될 수 없으니, 나쁜 머리로라도 공부를 계속해서 고대나 연대 서강대 정도라도 들어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영화 배우계의 여신 '소피 마르소'의 배우자라면, 마땅히 그 정도의 학벌은 돼야 하니까! 당시에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성문 종합 영어]를 5번 읽으면, 서울대를 가고, 3번을 읽으면, 고려대나 연세대를 간다는 말이 있었다.
고2 때 내 짝이었던 용구는(영구 없다~의 영구 아님!), 이미 고2 때 [성문 종합 영어]를 3번 읽었는데, 결국 서울대 경영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용구에게 자극을 받아서, 나 역시 거금 5천 원짜리(?. 가격이 확실하지는 않다) 성문 종합 영어를 구입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입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하시던 문방구에서 그냥 가져왔다. 나의 아버지는, 피터팬 PD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네에서 작은 문방구를 하시면서 학생들의 참고서도 파셨는데 , 인터넷 서점이 없던 시절이라서, '참고서 장사'가 문방구의 제법 큰 수입원이었다)
지금은 [성문 종합 영어]도 수능 영어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서, 2004년에 개정된 새 버전이 팔리고 있지만, 필자가 그 책을 샀던 1986년도에 그 책은, 1967년에 세상에 처음 나왔던 초판 그대로였다. 미국에 사시는 페이스북 친구분이 올리신 거처럼, 비닐 커피에 초록색 표지가 있었고, 책을 2~3번 읽다 보면 비밀 커버가 찢겼기 때문에, 그 안에 보라색의 더 견고한 ‘레쟈’ 비슷한 커버가 드러나는 책이었다.
영어교재의 최고봉이라는 [성문 종합 영어]를 구입했으니,
'서울대쯤은 내게도 따놓은 당상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내 짝 용구처럼, 그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1주일 만에 그 책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일단 문법 파트 설명이 불친절했고, 독해 구문이 내 영어 실력과 비교해서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부머리가 단대부고 최고였던 내 짝 용구에 비해서, 필자는 한참 뒤떨어지던 학생이었다.
여기에도 역시 합리적이고 근사한 핑계를 대자면, 신부님이 되려고 고민을 할 때,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던, '나의 미래의 아내 소피 마르소'가, 매일매일 날이 갈수록 너무 좋아져서, 도통 머릿속에 공부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주일 만에 [성문 종합 영어]는 책장에 처박아 두었고,
대신 무더운 여름날, 600페이지를 육박하던 그 책을 꺼내,
얼굴을 가까이 대고 휘리릭 책장을 넘기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선풍기 대용으로 쓰곤 했었다.
이 책을 5번 완독 했다는 내 짝 용구는, 전술한 것처럼 서울대 경영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갔고, 이 책을 선풍기로 썼던 피터팬 PD는, 안암동에 위치한 막걸리 대학교 경영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입사시험 준비를 위해서, 영어는 늘 숙제처럼 따라다녔는데, 당시에 대학생들은 [이재옥 토플] 또는 [아카데미 토플]을 마치 고등학생 시절의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 종합 영어]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에,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이재옥 토플]. 피터팬 PD에게는 토플책의 쌍봉인 [이재옥 토플]과 [아카데미 토플] 2권이 다 있었지만, 결국, 토플에 눈을 뜨게 해준건, 빨간색 표지로 유명한, [영어 순해]의 저자 김영로 선생이 저술한 [고려원 토플]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성문 종합 영어]를 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고등학생 때는,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그 책이, 대학생이 되니까 머리가 굵어진 건지, 쉽게 쉽게 페이지가 넘어갔기 때문이다.(선풍기 대용으로, 바람을 일으키려고 휘리릭~ 책장을 넘긴 게 아니었다. 진심, 정독을 했는데도 그랬다!)
어쩌면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내가 더 이상 소피 마르소의 남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공부머리가 생겨난 건지도 모르겠다. (피터팬 PD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고대 국문과 87학번 선배 중에, 소피 마르소보다 더 예쁜 누나가 계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이던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단대부고에서는 야간 자율학습이란 걸, 자율이 아닌 반 강제로 시켰는데, 반 아이들 상당수가 밤 11시까지 학교에 남아서, 명목상 '자율학습'을 했었다. 나 역시 방과 후에 특별히 할 것도 없었고, 또 집에 일찍 가봤자,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대가 아니다 보니,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어서, 학교에 남아서 자율학습을 했다.
그 시절, 한 여름에는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해대고, 추운 계절에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밤 11시까지 [성문 종합 영어]와 [수학의 정석]에 머리를 쥐어박던, 피터팬 PD의 그리운 학우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야간 자율학습을 한다며 같이 학교에 남아있기는 했지만, '소피 마르소'나 '브룩 쉴즈' 또는 '피비 케이츠'의 책받침을, [성문 종합 영어]보다 더 사랑했던 또 다른 친구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 소피 마르소의 존재를 몰랐었다면, 피터팬 PD는 신부님이 되었을까?
- 결국 나이 오십에 이혼을 하고, 제주도에서 혼자 살게 된 걸 보면,
피터팬 PD는 독신으로 살 팔자로 세상에 태어났던 걸까?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기를 내서 파리로 찾아갔다면, 소피 마르소가 나의 신부가 되어줬을까?
오늘도 제주도 표선면의 늦은 밤에,
[성문 종합 영어] 장문 독해 속 명문장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1967년 초판이 나온 [성문 종합 영어]의 2004년 개정판. 피터팬 PD는 왜 아직도 이 책을 보면, 영화 [라붐]의 주인공 '소피 마르소'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행복한 꿈을 꾸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