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이에요.
『짜릿하고 따뜻하게』 이시은 · 달 출판사 · 2011
2011년에 나온 책이 2026년에도 팔리고 있다. 오래된 책이 살아남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닳지 않는 질문을 품고 있거나, 처음 읽었을 때보다 나중에 읽을 때 더 잘 이해되는 문장이 있거나. 이 책은 둘 다였다.
2011년은 지금처럼 유튜브로 일본 광고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카피라이터가 아니면 일본 광고의 언어를 일부러 찾아볼 이유가 없었다. 그 시절 이 책은 일본 광고를 소개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블로그에 좋아하는 것들을 모으다 출간 기회를 얻은 작가는, 광고 하나씩을 꺼내 자신의 삶 이야기와 나란히 놓았다. 형식이 낯설었고, 그래서 오래 읽게 됐다.
일본 광고는 잔잔하고 서사가 길다. 적어도 내가 좋아했던 일본 광고들은 그랬다. 한국 드라마가 자극과 속도로 달린다면, 일본 광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쌓았다. 그 온도 차이는 두 나라의 경제적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때 세계를 제패할 것 같았던 일본이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버블이 꺼지며 잃어버린 30년을 걷는 동안, 한국은 여전히 꿈꾸고 있었다. 버블도 많고 빚도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직 에너지가 있는 사회. 일본 광고가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할 때, 한국은 아직 "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각으로 살고 있었다.
광고는 30초의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짧은 시간 안에 메시지를 던지고,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겨야 하니까. 지금은 쇼츠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알고리즘이 쉬지 않고 다음 영상을 밀어 넣으면서 쇼츠는 뇌를 0으로 리셋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짧은 자극, 그리고 또 다른 자극. 선택이 아니라 소비가 되는 순간, 메시지는 사라진다.
고개를 숙이고 미디어를 보는 시대에도 텍스트가 주는 힘을 믿는다. 라디오 광고처럼. 이미지 없이 문장만으로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글을 통해 섬세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좋다. 다 보여주는 것 같지만 핵심은 남겨두는 사람. 그 결을 좋아한다.
작가 이시은이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광고를 골랐는지, 그 광고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읽다 보면,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은 결국 사람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조금 더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오랜만에 다시 펼친 책에서 한동안 멈춘 광고가 있었다. 니카이도. 보리소주 광고였다. 카피는 짧았다.
꼭 무엇이 되어야 행복한 것도 아니고
꼭 뭘 이뤄야 행복한 것도 아니죠.
이 문장 앞에서 한참 있었다. 2011년에도, 2026년에도.
세상에는 이렇게 어중간하게 사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나름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작가의 말
49p.
저는 모험을 하지 않아서 좋은 어른은 아닙니다. 수많은 깨달음이나 경험 따윈 갖고 있지 않습니다. 좋은 충고가 제 안에 쌓여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이야기는 친구처럼 들어줄 수 있겠죠. 세상에는 이렇게 이야기만 잘 잘 들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혼자 다독여봅니다.
작가의 말
51p.
나는 소중합니다.
혼자 있는 나보다 둘이, 혹은 셋이 서 있는 내가 소중합니다.
당신이 소중하니까 더더욱 나를 소중히 다루고 싶습니다.
나는 건강할 겁니다.
그리고, 강해질 겁니다.
인간은 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 강해진다는 말을
신앙처럼 믿고 있습니다.
83p.
그런 건가봅니다. 어렸을 때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지금도 좋고, 어렸을 때 좋아했던 가수가 지금도 좋고, 어렸을 때 친구들이 지금도 좋습니다.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이유 없이 좋아하거나, 바보처럼 굴거나 그랬던 것을 함께 공유한 그들 모두가, 지금도 좋은 것이죠. 세월이 흘러 아이스크림 맛은 조금 변했고, 가수는 예전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친구들은 사회에 물들었지만, 그럼에도 그건 나와 함께 성장한 거라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금도 좋은 것입니다 그건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술자리에서 어렸을 때 봤던 만화영화 얘기에 다들 흥분하고 드라마 얘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말이죠. 서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세상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메이지의 카피에 공감하게 됩니다. 나 역시도 조금 안심하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