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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Nov 22. 2016

'오디오 북' 들으며 운전하기

2016.11.22




나의 운전 중 ADHD 증상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에겐 분명 ADHD 증상(주의력 결핍 증후군)이 있다. 운전할 때 가장 심하다. 정면만 바라보기란 정말 힘들다. 한산한 도로를 운전할 때면 등을 시트에 좀 편하게 대고 여유롭게 드라이빙을 즐겨도 좋으련만, 나는 어찌 된 게 더 상체에 바짝 긴장을 주고 눈을 부라리며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들어가고픈 카페는 있는지, '임대'라고 현수막이 걸린 자리는 원래 무슨 가게였는지, 주유소 입구에  큼지막하게 걸린 '휘발유, 경유'의 숫자를 보며 다음엔 저기서 기름을 넣어볼지 가늠해본다. 정지 신호에 차를 멈추면 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인터넷 창을 켠다. 흥미로운 기사라도 발견하면 짜증이 잔뜩 담긴 뒤차의 '빵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한다. 

 

    여유롭게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라디오를 틀면 중간에 광고가 너무 나온다. 차 안에 저장해 놓은 내 음악은 업데이트가 잘 안 해서 지겨워 진지 오래다. 가끔은 블루투스로 최신가요를 순위별로 듣기도 하지만, 빠른 비트에 숨도 안 쉬며 각혈하듯 뱉어내는 힙합 음악은 영 거슬리고, 여자 아이돌 그룹의 낭랑한 목소리는 매번 같은 패턴에 좀 지루하다.  




안전 운전을 위한 방법,
'오디오 북'


   가족들을 태웠을 때에는 그나마 덜한데, 혼자 운전할 때엔 그 '주의력결핍' 증상이 절정을 이룬다. 전에 한번 곰곰이 내 증상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했더니, 아무래도 내가 은연중에 차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To-do list'를 쓰고 한 줄 한 줄 지워나가길 좋아하는데 (이 버릇은 시험기간에 공부할 범위를 하루하루 배당하고 지워나가던 그 옛날 범생이 습관에서 시작되었다. 특별히 공부를 무척 잘했다기보다는 그 당시 공부만이 살 길이었던 외모였습니다만...)  차에서 삼사십 분 가만히 운전만 하고 있으려니 좀이 쓰는 거였다. 그래서 나름 안전운전도 하고, 시간 활용도 유용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을 강구해냈으니 그것은 바로 '오디오 북'이다.  


    나는 차 안에서 오디오북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오디오북은 책을 녹음한 것인데, 도서관 회원 아이디만 있으면 누구나 '전자도서관' 이용이 가능하다. 전자도서관도 오프라인 도서관과 시스템은 비슷하다. 다운로드할 수 있는 권수가 정해져 있고, 자기가 소속되어있는 지역이나 대학교에 따라 전자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책이 다 다르다. 책을 성우들이 읽어서 녹음하는 작업이 쉽지 않은 만큼 전자도서관의 책들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이 유명하거나, 실용적인 책 위주로 준비되어있다. 예를 들면, 공지영의 도가니, 김훈의 칼의 노래 같은 베스트셀러도 있고, 베니스의 상인처럼 고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내가 주로 듣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문학' 장르이다.    




저번 주 차에서 폭 빠져 들은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 씨'



   저번 주 시댁에 아이들을 맡길 일이 있어서 데려다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오디오북을 켜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날 들은 책은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 씨'였는데 단편이라길래 짤막하니 듣기 좋겠다 싶었다.  


    이야기는 할머니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중풍에 걸린 80살 남편에 가끔 손주와 며느리가 집에 놀러 오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할머니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남편을 보며 자신의 꽃다운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복희는 어렵게 생활비를 버는 엄마와 아직 어린 동생과 힘들게 살고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공장에 들어가라는 엄마의 성화에 홧김에 짐을 싸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서울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성거리다 우연히 만난 아저씨를 따라 방산시장의 큰 가게에 식모로 들어간다. 아저씨의 부인을 병으로 잃고 홀아비가 되어 가게를 꾸리고 있었다.  


    복희는 그 집 사랑방에 하숙을 하는 대학생에게 들어가는 상에는 '계란 프라이'라도 한 접시 더 올리며 연정을 품는다. 어느 날 대학생은 밥상을 올린 복희에게 앉아보라고 한다.  


"복희야, 여자 손이 이게 뭐야. 손 좀 이리 줘봐" 


소녀 복희가 수줍게 대답한다.  


"야?" 


  풋풋하고 다정한 대학생의 목소리에 내 마음도 살랑살랑 거리기 시작했다. 오디오 북은 성우들이 배역에 맞게 극을 풀어기가 때문에 몰입이 더 직접적이다. 목소리로 승부해야 하는 성우들의 연기력은 뭇 배우들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야기의 반 정도 들었을 때 이미 나는 먼발치에서 언강생심 꿈도 못 꿀 대학생을 몰래 숨어보는 '소녀 복희'가 되어 있었다. 응큼한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청년이 꺼낸 것은 '바셀린 연고'였다. 식모살이를 하느라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복희의 손에 연고를 부드럽게 발라준다. 훈훈한 장면에 괜히 나도 쫄밋해지는게 감탄사가 나왔다. 


"어어↗얼↘얼....." (넘의 연애에 히죽거리는 아줌마 소리임) 


   복희는 자기 몸을 요요한 향을 내는 '박태기나무'가 된 것 같다며 환희를 느낀다. (박태기나무는 봄에 잎보다 분홍 꽃이 먼저 활짝 핀다고 한다) 대학생이 쥐어준 바셀린 병을 받아서 도망치듯이 나와서 떨리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복히는 혼자 말한다. 


"대학생이.. 나를. 애껴주는 겨. 이 복희를 애껴주는 것이여" 


아... 내 가슴이 떨려왔다. 이성이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기분이야 말로 참 좋지 않던가. '잡힌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 우리 남편도 소싯적 나에게 그리 공을 들이지 않았나. 되바라지지 않은 청춘의 설레는 교감은 어찌나 짜릿한가. 운전하는 복희가 되어서 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복희가 부엌에서 혼자 손을 미지근한 물에 담그고 있었을 때였다. 미지근한 물에 손을 불리고 바르라는 대학생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성큼성큼 들어온다. 


"복희 이년, 요즘에 왜 이렇게 암내를 풍기는 것이여" 


   그러면서 복희를 질질 끌고 다짜고짜 안방으로 들어간다. 복희의 찢어질 듯한 울음과 비명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안 돼" 나는 탄식의 혼잣말을 내뱉었다. 충격에 소름이 돋았다. 가슴이 쿵쿵쿵 뛰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찌 이런 일이... 꽃같이 우리 복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끔찍했다. 순결을 짓밟힌 복희의 참담한 독백을 들으며 나도 눈물이 뚝뚝 흘렸다. 눈과 코가 매워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운전대를 나는 단단히 잡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달 뒤 복희는 국을 끓이다가 '우욱~' 하며 전형적인 입덧 증상을 보인다. '아 어떻게 해' 하고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복희는 아저씨에게 아이를 지울 돈을 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저씨의 말.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랑 같이 살자. 복희야" 


황당하고 가 찼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애초부터 '이러려고' 그 나쁜 짓을 한 모양새였다. 나는 '나쁜 놈'을 연발하며 다음 상황이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복희가 이 아저씨와 결혼을 하는 건지. 대학생은 다시 등장 안 하는 건지. 할머니가 된 복희의 중풍 걸린 남편이 결국 누구인지 나올 터였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침을 꿀꺽 삼키고 복희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오디오 북의 파일은 그걸로 끝난 것이다. 복희에게 같이 살자는 아저씨의 제안에 복희가 대답할 결정적인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다였다. 내용이 중간에 끊긴 적은 처음이었다. 감질나다 못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 나는 차를 세우고 내가 오디오 파일을 빠짐없이 받았는지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결국 차를 도서관 방향으로 돌렸다.  


다행히 '친절한 복희 씨' 책이 있었다. 내용을 읽으며 다시 한번 놀랬는데, 사실은 이 책은 대화체가 거의 없는 짤막한 단편소설이었다. 오디오북 제작업체에서 이 소설을 극본으로 각색을 해서 더욱 재밌게 극적인 요소를 더한 모양이다. 몇 십장도 안 되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치우곤 나는 복희의 인생이 그 이후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리고 중풍 걸린 지금의 남편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안전한 운전을 위해서


내가 '오디오 북'을 듣기 시작한 것은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서인데, 이 방법에도 변수가 있는 것 같다. 너무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운전 중에 헤벌쭉 심쿵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다음에 들을 책은 좀 극적인 요소가 덜한 가벼운 에세이나, 내용을 이미 아는 고전으로 들어야겠다.   


아, 

그리고 복희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신 분 계신가? 


흠흠...

그건 본인이 직접 책으로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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