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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pr 24. 2017

철쭉꽃아 미안하다.

2017.4.24.

 



그러니까 진이는 어떤 여자애냐.



아빠의 퉁명스러운 말투 하나만으로 혼자 삐져 

수영장에서 빠질세라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파파의 눈길을 무려 한 시간 동안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안 하는 지지배다.

(말도 안 통하는 사이판 리조트 한가운데에서 파파는 더 외롭고 추웠다는 후문)


유치원 체육복 바지와 내복이 아니면 

항상 스타킹에 공주 드레스를 입은 지 일 년 남짓 된다.

게다가 날씨와 상관없이 팔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선호하고

요즘엔 장신구가 달린 머리끈을 예방주사 맞은 자리에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근데 진아 그런 스타일은 엄마가 듣도 보도 못했다야) 


꽃을 보면 향기가 좋다면서 

길에서 주운 페트병에다 꽃을 잔뜩 따서 넣어놓고 냄새를 맡으라고 한다.


"으흠.. 향기가 정말 좋다"


하고 리액션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금은 좀 질려서 최소한의 리액션만 간신히 보이는 중이다.



진이의 봄꽃놀이


진이가 요즘 봄꽃놀이가 한창이다.

사실 핑크색을 좋아하는 진이에겐

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요즘 사방이 핑크색)


특히 철쭉꽃만 보면 그냥 지나가질 않는다.

맨날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철쭉꽃에겐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철쭉의 팔자다.

왜냐하면 철쭉은 다른 꽃과 달리 유아의 키에 아주 딱 알맞게 낮은 데다

색 또한 진이 또래의 유아들이 홀릭하는 핫핑크 아니던가.


진이의 철쭉꽃 사랑은 

오늘 유치원을 마치고서도 계속되었다.

머리끈에도 철쭉꽃을 살짝 넣어 고정시켜줘 봤다.




맘에 드는지 아주 좋아했다.

오늘 진이 머리 모양도 아주 이쁘게 잘 묶여서 

나도 맘에 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너무 많이 따오는 것도 교육상 안 좋을 것 같고,

특히 아직 피지도 않는 '꽃봉오리'를 막 따올 때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진아, 이 꽃봉오리는 활짝 피지도 못하겠네. 네가 따버리면 죽는 거야. 꽃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잠시 후에 사뭇 심각해진 진이가 나를 불렀다.


지금부터 진이의 죽은 꽃 살리는 방법 공개.


다시 나무 사이에 넣어준다. 

(그런데 하필 다 시들어빠진 나무 사이...)






또 진이가 야심 차게 나를 데려간 곳은 

바로 모래놀이장.

씩씩하게 말한다.


"엄마, 내가 다시 흙에 심어줬어"






철쭉꽃, 꽃봉오리들아.


나 진이 엄마야.


아줌마가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긴 하다.


미안해.






+



이런다고 다시 꽃 피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니까

진이가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다.

당황한 엄마의 어줍지 않은 대답.


"그럼 물에다 꽂아볼까?"


이렇게 산전수전 다 겪은 꽃봉오리는 


결국 우리 집 식탁 위에 오게 되었다.










++



미안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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