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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May 20. 2016

참 급하게도 오신 그분

2016. 5. 19



아프면 다 소용없다


  올 들어 최고 기온을 찍었다는 날, 나는 이불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자세를 바꾸면 덜 아플까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두통은 그대로였다. 방금 게워내고 왔는데 또 뱃근육이 몇 번씩 움찔하며 식은땀이 난다. 곧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인데 겁이 나서 알람을 켰다. 아이 하원 20분전으로 맞추고 다시 눈을 붙여본다. 과로해서 그런 걸 거야. 일단 조금이라도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요 며칠 너무 늦게 자긴 했지. 


  알람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절망했다. 정말 이건 아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아팠지? 아주 오래전에 빈속에 소주 마신 다음날 이랬는데... 그래 숨 쉴 때마다 아픈 거 참 오랜만이다. 이럴 때 친정엄마라도 주위에 있으면 하는 생각, 아는 엄마한테 아이들 좀 받아달라고 할 생각도 조금은 해봤다. 하지만 어차피 신랑 올 때까지 다 내 책임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집히는 긴팔 옷을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차 안에 풍기는 냄새가 이렇게 역할 줄은. 내일 당장 스팀세차를 맡겨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들이 어항 속처럼 뿌옇게 보인다. 가까스로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데리고 오자 맥이 탁 풀린다. 침대에 누워서 엎치락뒤치락하는데 아이들도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씻지 않은 그 옷 그대로.. 그 부분은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들다) 아이를 안고 있는데 아이한테 무척이나 미안해졌다. 


"엄마 빨리 나아"

"어.. 엄마 금방 나아서 우리 아들 챙겨줄게."

"엄마 추워? 내가 따뜻한 물 갖다 줄까?"

"응.. 우리 아들 고마워"


딸은 엄마 아프니까 내가 치료해준다고 의사놀이를 조금 하다 금세 지겨워졌는지 침대 위에서 뛰면서 노래를 부른다. (뛸 때마다 뇌가 빠지는 줄) 집안엔 책, 장난감, 옷들로 난장판이었고, 멀찌감치 바라보며 곧 퇴근할 신랑한테도 무척 미안했다. 신랑은 미리 사온 피자로 저녁을 해결하는 모양이었고, 아이들도 다 씻기고 집도 말끔하게 다 치워놓은 듯했다.


'아프면 다 소용없다'는 말은 내가 직장에서 거의 매일 하는 말인데, 막상 내가 아프니 그 말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불이 꺼진 방안에서 눈을 감고 전기장판에 몸을 지진다. 거실에서 아이들과 신랑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척 미안하다, 내가 아프니까 아이들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신랑은 신랑대로 퇴근해서 온갖 집안일을 다하고, 아이들은 엄마가 아프다니까 괜히 불안해 보이고, 그러면서 더 미안하다. 


"미안해. 얘들아. 여보 미안해. 빨리 나을게"



급하게도 오신 그분


   그 다음날 오후 2시까지 계속 잠만 잤다. (신랑이 아이들을 아침에 모두 데려다줬다.) 그 쯤되니 머리가 조금 뻐근하지만 덜 한 것 같다. 신랑이 사다 놓은 죽을 조금 먹어보니 울렁이는 증세가 없었다. 괜찮아진 거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셔봤다. 멀쩡했다. 진심으로 기뻤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도 말리고 아이들을 데리러 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간식을 해줘야지. 얼마 전 한비랑 님이 오트밀 쿠키를 맛있게 해 먹었던데, 집에 오트밀이 좀 있으니 한 번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연드림에 들려 시금치, 두부, 계란, 콩나물 같은 기본적인 식재료를 샀다.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쿠키를 해준다는 말에 아이들이 무척 신나 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엄마 역할 제대로 해줄게. 어제 잘 못 챙겨줘서 딱했다고, 내 새끼들...)


   오트밀, 아몬드 슬라이스, 설탕 등을 잘 계량해서 준비하고 섞었다. 계속 지켜보던 딸내미가 자기도 하겠다고 나선다. 오트밀 가루가 잘 날리니까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역시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게 많아. 하하)  비닐장갑을 끼고 해보겠다고 서랍에 있던 비닐장갑을 몽땅 꺼내 바닥에 흩뿌렸다.(헉.. 그래 아직 어린아이니까. 그럴 수도) 나는 바닥에 반죽을 놓고 몇 개 떠서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반죽을 바닥에 뚝뚝 흘린다.(그래 이따 한꺼번에 치우면 된다. 어금니 꽉) 난 흘리니까 엄마가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본다. 그러자 딸내미가 막 울면서 하겠다고 떼를 부린다.(으으으....아들은 뭔가 이상 기운을 감지했는지 장갑을 벗어던지곤 거실로 달아났다.) 한번 구을 만큼의 분량을 동그랗게 다 만들어 오븐에 넣으려고 하자, 딸내미가 자기는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고 운다. (온다.. 그분이 오신다) 일단 예열을 해놓은 오븐에 한판을 넣고 다음에 넣을 오븐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그럼 네가 만들어봐' 했을 때부터였다. 이미 그분이 오셨던 것이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 아이들도, 신랑도 두려워하는 그분. 오죽하면 신랑이 이름을 붙여줬을까.(이름은 비공개. 마지막 자존심이랄까요) 아이들이 괴물 이야기를 읽다가 무서워하면, '엄마가 괴물한테 화낼 거야' 하면 된다. 그러면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 꼭 해줘' 하며 안심을 할 정도니까.(씁쓸하다) 


아이들이 그만큼 무시무시하게 여길 정도로 

중성적인 목소리에 

아주 아주 화끈한 그분이 가끔 나에게 강림한다. 


그리고

엄마의 부재에 아아들이 참 딱해 보였던 바로 그 다음날

그분이 참 급하게도 오셨다.




+

미안해 얘들아. 

그래도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그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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