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글쓰기 시대의 철학적 성찰
저자 개념의 역사적 해체
데이비드 군켈 교수의 논문 "AI의 등장과 '저자'의 죽음"은 대형언어모델(LLM)의 등장이 가져온 근본적 변화를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이 글의 핵심 주장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저자' 개념이 사실 근대 유럽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며, LLM의 등장은 이러한 저자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글의 저자는 롤랑 바르트의 1967년 비평문 '저자의 죽음'을 인용하며, 저자 개념의 기원을 16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근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 시대의 민담, 신화, 종교 경전 등은 특정 저자 없이도 인류 문화 속에 전승되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 개념은 개신교 종교개혁의 개인화된 신앙,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합리주의 철학, 그리고 사유재산 개념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합류점에서 형성되었다.
인쇄술과 저작권의 상관관계
특히 주목할 점은 저자 개념이 예술적 이상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일으킨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런던에서 처음 도입된 저작권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스벤 버커츠의 분석에 따르면, "개인 저자성 개념은 인쇄술이 구술을 대신해 문화적 소통의 기반이 되기 전까지는 대중의 인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텍스트의 기계적 복제와 유통, 그리고 이를 통한 수익 창출이 가능해지자 저자를 밝히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LLM과 의미 형성의 새로운 패러다임
LLM의 등장은 이러한 저자 중심적 사고에 근본적 도전을 제기한다. 챗GPT, 클로드, 딥시크 같은 LLM이 생성한 텍스트는 말 그대로 '저작권이 없는' 글이며, 미국 연방항소법원도 AI에게 저작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상실이 아닌 해방으로 해석한다. LLM은 작가와 독자 모두를 '저자'라는 이름의 권위적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통찰에 따르면, "저자의 죽음은 곧 비평적 독자의 탄생"을 의미한다. 의미 형성의 중심이 저자에서 독자로 근본적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진정한 인격이나 목소리에 의해 선험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읽기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읽기의 경험을 통해 발생한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본 LLM의 정당성
저자는 20세기 구조주의 언어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LLM을 옹호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와 의미 형성의 본질을 언어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의 문제로 이해하며, 단어들이 외부 사물에 직접 대응함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형성한다고 본다. 이는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의 의미이기도 하다.
LLM이 실제 세계의 구체적 대상과 연결되지 않은 채 단어들을 순환시킬 뿐이라는 비판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언어의 본질적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LLM은 "구조주의적 머신"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식 고전 기호학의 전통적 의미 작용 전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시사점: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LLM을 단순히 인간 저자의 종말이나 위협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넘어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LLM은 글쓰기, 저자, 진리의 개념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특정하고 제한된 이해 방식"을 위협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이 글은 현재의 AI 담론에서 간과되고 있는 철학적 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AI 전문가들이 이미 정당성이 약화된 '저자성'과 '권위'의 개념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것이 LLM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이 제시하는 비전은 저자 중심적 사고에서 독자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세상에 떠도는 아이디어를 누군가가 정리해주면, 그것을 선별하고 비평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독자이며, 독자만이 "단단한 실체"로서 문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AI 시대에 인간의 역할이 창작자에서 비평적 수용자로 변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통찰이다.
이 글은 PADO의 'AI의 등장과 '저자'의 죽음'이라는 글을 요약하고 약간의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PADO의 원글이 읽고 싶으시다면 https://www.pado.kr/article/2025071112098809693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