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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훈 Jan 31. 2016

진심을 그대에게

오타쿠 진화론 by 이진석

1997년의 늦은 밤.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학생 3명이 모였다. 부모님이 여행을 떠난 주말은 최고의 기회였다. 우리는 숨죽여 비디오테이프를 화면 속으로 밀어 넣었다. PC통신 천리안의 애니메이션 동호회 개인 장터에서 산 복제 테이프였다. ‘극장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에어THE END OF EVANGELION: AIR /진심을 그대에게>’라는, 처음 보는 사람은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목이 도트 프린터로 인쇄되어 정성스레 붙어 있었다.


세 소년은 이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병실에 누운 소녀의 파헤쳐진 앞섶을 보며 수음하는 소년, ‘어른의 키스’를 가르쳐주고는 다음을 기약하는 연상의 여인을 보며 느낀 성적 긴장감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화면에 흐르는 난해하고 복잡한 장면들에 빠져들어 숨을 죽였다. 영상은 느닷없이 실사로 전환돼 영화관에 앉은 나른한 표정의 관객들을 비추었다. 바다 건너편의 세 소년들과 함께 2차원으로 빠져든 사람들―‘오타쿠オタク’였다. 문정동의 소년들이 받은 충격은 애니메이션 <극장판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1984)에서 지구의 문화를 접한 외계인들이 "데카르챠!"(외계인의 언어로 "말도 안 돼"라는 뜻)라는 감탄사를 터뜨리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타쿠라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중략)...


18년 전 밤에 품은 충동을 억누르며 살던 소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떠났다. 대학원과 아르바이트를 오가는 와중에도 아키하바라와 나카노의 애니메이션 상품 전문점을 이 잡듯 뒤지고,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와 게임 행사를 누볐다. 그렇게 막연하기만 했던 오타쿠의 실체와 변화를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즐거움과 깨달음, 그리고 약간의 고민과 걱정. 이 모든 생각을 담아 조심스레 권하고 싶다. 부디,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을, 그대에게.



서문을 그대로 옮기면 책 소개가 될 듯 싶었다. 사실 내가 더 할 말이 없다.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쓸 수 있는 필자에게 원고를 맡겨서 좋은 책이 나오도록 하는데 일조한 것 같아 그냥 스스로 자랑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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