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하책방 Feb 13. 2021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詩와 나무


굴참나무숲 너머 자작나무숲이 아름다운 날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태풍이 그 나무 속에 있다
나는 길 위에 있고 파도는 길 밑의 길까지 밀려온다
나는 태양을 향해 걷고
태양은 내가 걷지 않는 길까지도 걷는다
그것을 음악이라 이름 부르면 삶은 더욱 깊어진다
바다로 가는 길 위에는 단지 세 그루의 나무만 서 있다
나무에 황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영혼에도
나무 세 그루는 서 있다
이 길 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대가 이 세상 한구석에 골목처럼 접혀 있어도
구석은 이미 보석과 같다
나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밑의 사랑 위에 있다
태양의 빛이 끝나는 길 위에는 달빛의 길 또한 흐르고 있고
수평선이 하늘로 빠지는 다섯번째 둔덕에서 부는 휘파람은 스산하다
그때 내가 읽었던 소설은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이다
그 소설은 내가 숲으로 가는 열한번째 길 바깥에서이다
사람이 가장 나중에 사랑해야 할 것이 여자라고 씌어 있던 소설은 적요하다
길 위에서는 돌을 사랑하고 돌을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읽고
일곱번째 바람이 부는 저녁 그 돌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돌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 강물의 창문은 하늘을 위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대를 위한 것이었다
바람이 알맞게 불고 봄 저녁이었고
포구에는 배가 불빛에 지치고 있었다
자작나무숲 너머 사람이 아름다운 저녁이 있고
그 숲을 지나 지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있는 자전거가 아름다운 날이다
나는 바다로 가는 길 위에 있고
그대는 내가 가는 길 끝에 있다
나는 그 길을 가장 낮은 천국으로 가는 첫번째 길이라고 이름 불렀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박용하 詩集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문학과지성, 1997)






길 위에 그대를 놓아두고 나는 이 길을 처음부터 다시 걷는다. 그것은 그대를 멀리 돌아가는 길이겠지만 내가 왜 이 길을 걷는지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서 있을 그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함일 것이리라. 그 길 위에 음악이 있고 별이 있고 달빛이 흐르기도 하고, 때론 바람이 일고 폭풍이 일고 스산한 쓸쓸함이 함께 할 것이다. 담담하고 고요한, 그 적요(寂寥)의 저녁. 어둑어둑한 길 끝, 빛나는 불빛 하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이름이 길에는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길을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부른다. 어쩌면 그대를 길 위에 놓아둔 것이 아니라 내가 길 위에 놓여진 것일 지도 모르기에 길이 바다에 이르고 산에 이르고 하늘로 가고 별로 가더라도 결국 내가 만날 빛나는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작가의 이전글 푸른 하늘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