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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Sep 09. 2022

분열을 앞둔 핵가족의 행복한 여름휴가

더딘듯 빠르게 스치는 한 세대

휴가를 맞춰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우리가 하나의 가정으로 다녀온 여행이 몇 번인지 다 알 수 없듯 앞으로 몇 번의 여행을 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동생이 결혼을 계획하고 있기에 우리의 한 시절이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목적지는 진안이었으나 가는 중 전북 완주군 대둔산 도립공원에 들렀다. 대둔산 케이블카는 타지 않고 대둔산 둘레길이 있어 산줄기를 따라 걸었다. 강한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길을 따라 호쾌하게 흐르는 물줄기가 시원했다. 걷는 사람도 거의 없어 유유자적하고 오붓하게 하산을 즐겼다.

다시 진안으로 향하다 금산 금빛시장에 갔다. 비가 올 수 있다는 예보를 봐서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맑고 무더웠다. 지자체에서 야심하게 꾸민 것 같은 아케이드 아래 깔끔한 시장과 청년들이 운영하는 몇몇 가게가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야외 차광막 아래 위치한 여러 상점도 처음 보는데 왠지 익숙한 느낌이라 반가웠다.

이번 여행은 반려견이자 가족 구성원인 사랑이 형과 함께하기 위해 애초에 숙소부터 정했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운일암 연가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이곳이 우리가 생소한 고장에 오게 된 이유였다. 넓은 잔디마당과 목조로 외관을 마감한 단독 주택 모두 취향을 저격했다. 다행히 가족들도 모두 만족스러운 눈치였는데, 특히 사랑이가 여기저기 다니며 좋아하는 게 느껴져 기뻤다. 짐 풀고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을 기록으로 남겼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물놀이를 즐기기 위해 근처 운일암반일암 계곡으로 이동했다. 예전에는 험한 지형으로 구름만 오가는 곳이라고 해서 운일암이라 부르고, 계곡이 워낙 깊어 햇빛이 하루의 반만 보여서 반일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너른 길과 다양한 편의 시설을 갖춘 유명한 휴양지가 되었다.

물살이 셌다. 평소에는 아마 이보다 유속이 느리고 놀기 딱 좋은 장소일 것 같은데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다.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 도착해 물도 꽤나 차가웠다. 다슬기 수경, 반두, 래시가드까지 야무지게 챙겨 갔지만 여의치 않아 다리까지만 담갔다. 짧은 시간이나마 나름 여유롭고 좋았다. 사랑이 수영 특훈 뒤 드라이브까지 알차게 즐기고 귀가했다.

숙소로 오자마자 불 피우고 준비해 우대갈비, 토마호크 스테이크, 새우, 소시지 등을 맛있게 먹었다. 직접 숯에 구운 우대갈비는 감칠맛이 폭발했고 토마호크 스테이크는 생각보다 양이 넉넉했다. 가족들과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며 누리는 기쁨은 아주 오랜 선조부터 이어온 가장 전통적이고 원초적인 행복 중 하나가 아닐까. 

금세 해가 지고 날이 저물어 간다. 별이 잘 보인대서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날이 흐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흐뭇하게 맑았기에 그조차 살갑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진안까지 왔으니 마이산에 가보기로 했다. 미처 몰랐는데 막상 마이산 도립공원에 도착하니 애완견 출입 금지였다. 고민하다 동생은 차에서 사랑이 형과 기다리고 부모님과 나는 마이산 탑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금당사와 탑영제를 거치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총 20분 정도 걸어 마이산 탑사에 도착했다.

멀리서 봐도 특이한 지형에 독특하게 자리 잡은 암자가 멋지다. 이렇게 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벌집처럼 구멍이 생긴 것을 타포니 현상이라고 한단다. 마이산 탑사의 탑들은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대군의 16대손인 갑룡 이경의 도인이 구한말에 자리잡고 타포니 현상으로 떨어진 돌로 나라를 구원해 달라는 마음으로 쌓은 것들이라고 한다. 구국을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지역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나서야 정말 말의 귀처럼 생긴 두 봉우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사실 돌아오는 날은 할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얼마 전 다른 일로 친척들이 모여 함께 묘소에 다녀오긴 했지만 집 근처에 할아버지를 모셨기에 뵙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추모공원이 닫기 전에 도착했다. 꽃다발을 준비해 한 번 더 감사를 전했다. 그렇게 쌓여가는 업무를 잠시 외면하고 다녀온 일박 이일의 짧은 가족 여행이 끝났다. 미처 끄지 못한 업무 협업 툴에 실시간으로 쌓이는 책무가 때때로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참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세대는 더딘듯 빠르게 스친다. 사랑하는 존재의 늙음을 깨닫거나 죽음을 겪을수록 유한한 삶의 가치를 똑바로 알게 된다. 나를 버티게 하는 고마운 스승들 덕에 짧은 여행에서 큰 기쁨을 누렸다. 앞으로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잘 분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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