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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Jan 09. 2023

텅 빈 마음을 채워 준 고운 단풍과 짙푸른 상록

가족들과 함께 떠난 내장산, 축령산 가을 여행이 준 위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덧없는 일상 속에 어느덧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사랑이 형이 떠나고 남겨진 가족은 삶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누리며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이른 새벽부터 준비해 길을 나섰다. 갈 때는 아버지께서 운전을 하셔 다시 잠들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내장산국립공원 근방에서만 1시간 넘게 밀렸다고 한다. 출발하고 무려 4시간 만에 도착했다.

입장하는 것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입구 근처에 내장사 근처까지 갈 수 있는 셔틀버스가 있는데 그 또한 줄이 너무 길어 그냥 걸었다. 올라가는 길이 워낙 아름다워 오히려 좋았다. 가뭄으로 단풍이 예년보다 못하다는데도 흐드러지게 예뻤다. 무엇보다 행복해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감사했다. 중간에 잠깐 쉬기도 하며 가을이 주는 정취를 누렸다.

내장산을 보고 나오는 길에도 사람이 참 많았다. 아니 더 많았다. 일생을 부지런하게 사신 부모님 덕에 참 많은 걸 누리고 사는 아들이다. 함께 단풍 구경을 하며 문득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에 비례해 북적이는 인파로 소란스러웠지만 그조차 하나의 풍경으로 감싸는 너른 계절이다.

오늘의 나들이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에어비앤비로 빌린 단독 주택이었다. 사실 사랑이 형과 같이 올 생각으로 애견 동반이 가능한 마당 넓은 집을 구했었다. 여행을 앞두고 겪은 급작스러운 사별로 다른 곳으로 옮길까 생각도 했으나 다들 마음으로라도 같이 오자고 해 그대로 왔다. 우리 형이 좋아할법한 너른 뜨락을 보며 사랑이를 참 많이 떠올렸다. 괜히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짐을 풀고 잠시 쉬며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다독이며 시절이 주는 선물을 누렸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냥아치(?)가 와서 당당하게 조공을 요구했다. 자꾸 사랑이 형이 떠올라 가지고 다니던 츄르를 비롯해 고기와 물로 마음을 전했다. 길 위에 놓인 모두가 최소한의 권리와 나름의 행복을 지키며 살아가길 기원한다. 사랑이 형 생각에 더 눈에 밟혔다.

유독 밝게 느껴지는 별과 달을 조금 구경하고 쉬다 잠들었다. 일상 속에서 별거 아닌 일이 괜히 버거운 나날을 만들곤 하는데, 여행에선 평범한 것들도 새삼스럽게 별것이 되어준다. 덕분에 특별한 하루를 마음에 새겼다.

이튿날엔 일정상 동생은 먼저 가고 부모님과 나만 남아 축령산 편백나무 숲에 들렀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시끌벅적하던 등산객들의 소리는 멀어지고 서늘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높고 곧게 뻗은 편백나무들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었다. 색색의 단풍과는 다른 상록수의 푸르름이 같은 감동으로 이어졌다. 올라올 때와 다른 길로 내려왔는데 한적한 흙길이 색다르게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군산에 들러 잠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예전 직장에서 다양한 일로 여러 번 찾았던 고장이기도 하다. 추억 아닌 추억이 많다. 동행했던 타 부서 동료들의 은근한 후기로만 접했던 호떡, 사회 초년생 때 맡았던 전국구 빵집 대표님과의 인터뷰 그리고 무엇보다 취약계층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마주했던 대화와 눈빛들이 오랜만에 삶으로 다시 떠올랐다. 이성당에서 인터뷰할 땐 함박눈이 펑펑 내려 안도현 시인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를 인용해 글을 갈무리했었는데 이번엔 맑다. 

뜻했던 사랑은 오지 않고 오히려 가장 가까웠던 사랑이 형이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 가슴이 뻥 뚫린 듯 상실감이 컸다. 가을임에도 색을 잃고 쓸쓸하게 가물던 마음에 다스운 가족 여행으로 곱게 물든 단풍과 짙푸른 상록을 덧입혔다. 사랑이 형을 위해 준비했던 너른 마당이 괜히 더 헛헛했지만 이 계절을 닮았던 우리 형을 온 세상에서 기릴 수 있었다. 조금은 철들었는지 스쳐가는 세월이 무심한 듯 속 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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