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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Jan 20. 2023

오래된 고장, 안동에서 깨달은 오랜 조연들의 고마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보낸 1박 2일

바로 지난주 주말, 동해에 다녀오며 운전을 도맡았기에 한 주 내내 여독이 짙었다. 온몸의 피로와 더불어 내향인으로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한 시절이 지나면 절대 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알기에 다른 소중한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무리해 2주 연속 여행을 떠났다.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고 떠나는 날 아침에 대충 짐을 꾸렸다. 원래 친구 차로 편하게 가려다 어쩌다 보니 또 내 차와 함께 교통을 맡았는데, 차도 몸살이 왔는지 안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갑자기 하향 전조등 하나가 나갔다...* 지친 운전자는 애마를 다독이며 중간에 휴게소에서 몬스터 에너지 한 잔으로 힘을 짜냈다.

다행히 길은 많이 안 막혀 국도로 갔는데도 3시간 40분 만에 도착했다. 2시쯤 직접 안동으로 온 친구를 픽업해 일행을 완성하고 안동구시장에 갔다. 오밀조밀하게 여러 가게가 모여있는 거리 분위기가 정겹다. 안동 바이브를 느끼며 시장 아케이드 안에 위치한 안동 우정찜닭에서 묵은지쪼림닭을 먹었다. 이름은 생소했지만 맛은 김치찜의 익숙한 그것이었다. 찜닭으로 유명한 고장답게 색다른 조합이 즐거움을 줬다.

든든한 식사 뒤 낙동강변에 위치한 영호루에 갔다. 고려 시대에 지어진 누각이 여러 차례 유실과 재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텅 빈 정자를 가득 채운 고요와 함박눈처럼 낙낙하게 쌓인 원색의 낙엽, 멀리 보이는 안동 전경이 아름답고 여유로웠다.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나오다가 맞은편에서 급하게 오는 차와 사고가 날 뻔했다. 긴장을 안 한 건 아니지만 타지 속 외지인임을 새기며 한 번 더 조심을 다짐했다. 다시 한 30분 달려 만휴정에 도착했다. 입장료 천 원을 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바위가 많았는데 사고가 잦았는지 곳곳에 귀여운 새가 살벌한 멘트를 해맑게 전하고 있다. 알고 보니 애니메이션 엄마 까투리의 '마지'라는 캐릭터였다. 해당 작품의 원작이 안동에서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살아간 권정생 작가의 유작이라 안동시 브랜딩에 활용하는 듯하다.

만휴정은 '말년에 쉬는 정자'라는 이름처럼 조선시대 문신 김계형 선생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곳이다. 산세가 아름다운 곳에 동양화처럼 자리한 한옥을 볼 수 있었다. 돌다리 전후로 공간의 시퀀스가 독특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애쓰고 있어 오가기에 조금 불편했지만 마음은 흐뭇했다.

이곳에서 인기 드라마였던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도 이뤄졌다고 한다. 나는 드라마는 뒤로하고 매표소까지 오가는 길이 고즈넉해 좋았다.

근처 안동 묵계서원으로 이동해 관광을 이어갔다. 앞서 뵌 김계행 선생과 조선시대 또 다른 문신이었던 옥고 선생의 뜻을 이어갔던 서원이었다. 당시 서원은 선현을 기리는 제사와 후학을 기르는 교육의 기능을 겸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과거와 미래가 이어진 현재가 펼쳐지던 곳이 아니었을까 혼자 추측해 본다.

바로 옆에는 한옥과 서양 문물이 조화롭게 만난 카페 만휴정이 있다. 공간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쌍화라떼를 마셨다. 쌍화차와 우유의 만남이 처음엔 생소했지만 마시다 보니 뜨끈하니 몸을 데워줬다. 

야경을 보기 위해 월영교 근처 주차장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주차한 곳 근처가 명당이었다. 카페 월영당의 인공 보름달을 구경하고 친구의 제안으로 급작스럽게 문보트를 탔다. 이렇게 전기로 가는 관광용 배는 처음으로 타 봤는데 음악, 조명, 온도 다 좋았다. 물 위에서 바라보는 월영교가 참 어여뻤다. 한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다리여서 그런지 프라하 카를교에서 느꼈던 들뜸 비슷한 낭만이 있었다. 25분 정도 적당히 타고 반납했다. 문보트가 갈 수 있는 영역은 줄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선을 넘다가 스스로 올가미에 걸린 배가 있어 어수선했다.

어느덧 이튿날이 되어 옥야식당에 갔는데 원래도 유명한 지역 맛집인 데다 직전에 바퀴 달린 집4라는 방송에 나와 그런지 기다리는 줄이 꽤 길었다. 거의 30분 정도 기다려 이 집의 유일한 메뉴인 선지국밥을 마주했다. 뜨끈한 국물은 맛있었고 건더기는 신선했지만 사실 그 자체만으로 아주 특별하진 않았다. 그런데 산초 향이 나는 배추김치가 정말 독특했다. 둘을 같이 먹으면 환상의 짝꿍이었다.


든든하게 잘 먹고 걸어서 중앙문화의 거리에 있는 맘모스베이커리 본점에 갔다. 맘모스제과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인데 군산 이성당, 대전 성심당과 함께 유서 깊은 전국 3대 빵집으로도 유명하다. 크림치즈빵, 유자파운드 등 대표적인 빵들을 선물로 샀다.

기념품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낙강물길공원에 가니 어느덧 1시가 훌쩍 지났다. 한국의 지베르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잘 꾸며진 곳이었다. 기대 이상의 조경을 자랑하는 공원이 맑고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더욱더 아름다웠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던 윤동주 시인의 시구가 떠오르는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뒤로하고 짧은 여정을 마쳤다. 누군가 곁을 떠나도 함께한 시간만은 낙낙하게 머물러 준다. 이젠 그리운 이름을 끊임없이 더하는 게 삶이라는 걸 익혔지만 때로 어떤 그리움은 감당할 수 없이 넘쳐흐른다. 호수만큼 보고픈 마음을 숨기며 한 동네에서 더불어 자란 친구들과 여행에 다녀올 수 있어 감사했다. 바쁜 나날 속에 모두 피곤해했지만 첫 입사를 앞두고 자전거로 스쳐 지났던 고장에서 서로를 위한 진심과 격려를 나눴다. 나와 정말 친한 친구 둘 사이의 미묘한 케미와 또 일관되게 짓궂은 나에 대한 농담들 모두 오래 간직될 거 같다. 어쩐지 스스로 단역으로 여길 때가 많은 시절에 서로에게 오래된 조연으로 남은 인연이 참 귀하다. 부디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많이 이루고, 성취와 별개로 항상 건강하고 더 많이 행복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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