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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Oct 11. 2021

상주가 간직한 소도시의 다정함

소도시에서의 3일을 통해 발견한 로컬의 가치와 늦춰야 닿을 수 있던 행복

이번 여름휴가의 목적지는 상주였다. 2박 3일간의 로컬 휴식 여행을 표방한 '아무튼, 상주'라는 프로그램에 우연히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해 이곳까지 오게 됐다. 상주에서 자기만의 브랜드를 키워가는 청년 창작자들의 모임인 '이인삼각'이라는 곳이 운영 주체였다. 로컬 창업, 창작 지원 프로그램인 로컬러닝메이트를 진행하고 계셨는데 그 프로그램의 참여자들이 주가 되어 만든 프로젝트가 '아무튼, 상주'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을 통해 로컬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커지던 차에 일과 책이 아닌 현장에서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더불어 대도시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직한 소도시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1일차

약속 장소인 휴-사이드왕산에 주차하고 나니 2시간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시내 구경도 할 겸 근처 카페에 가기로 했다. 상주 도심은 골목이 예쁘고 평화로웠다. 다만 큰 길 횡단보도에선 보행자 초록불인데 차들이 브레이크를 밟기는커녕 엑셀을 밟는 경우가 잦아 당황스러웠다. 치일 뻔하고 치일 뻔한 사람을 몇몇 보며 카페에 도착했다. 

무양주택은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주택의 모습을 간직한 외관과 취향이 묻어나는 깔끔한 인테리어가 조화로웠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커피 대신 밀크티를 마셨는데 기회가 된다면 커피와 에그타르트를 맛봐야겠다. 휴가인데 업무적인 요청이 있어 일 좀 하고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읽었다. 어제오늘 시인의 영혼이 담긴 글을 통해 큰 감동을 받는다. 좋은 공간에서 보낸 흡족한 시간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되어 처음 뵙는 분들과 행사에 대한 안내를 간략히 듣고 오랜만에 자기소개를 했다. 어색함이 감도는 학기 초 교실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로컬 재료로 피자 만드는 체험을 했다. 피자를 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미리 준비해 주신 피자와 상주에서 난 여러 과일을 먹었다. 정말 너무 맛있었다. 아직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과 먹는 음식 못지않게 맛깔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윗집과 아랫집, 두 채로 나뉘었고 집별로 2인 1실의 방이 여러 개 있는 구조였다. 방에 들어서니 정성껏 준비한 웰컴 키트가 미소를 자아낸다. 집마다 조장을 뽑으라고 하셔 침묵을 못이기고 나섰다. 딱히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나의 여전한 오지랖을 오랜만에 실감하며 같은 숙소에 묵는 분들과 삶을 나누다 잠들었다.



2일차

6시가 안 되어 깨서 뒤척거리다 룸메이트 분이 아침 러닝을 나가실 즈음 나와 산책을 시작했다. 밤에 미처 보지 못한 숙소의 외관이 멋스럽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아직 서늘한 기온과 흐렸지만 맑게 느껴지는 하늘, 구름이 비치는 북천이 정말 아름다웠다.


천천히 가라는 표지판도 왠지 위로가 되는 그런 길이었다. 충만한 위로 덕에 느슨해졌을까? 동네로 돌아와 숙소를 못 찾고 조금 헤맸다...* 덕분에 다른 골목을 알게 되었고 커진 반가움으로 우리집(!)과 재회했다. 


어느덧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할 시간이 되어 일회용 필름 카메라와 거기에 담긴 온기를 받고 하루를 나섰다.

첫 일정은 스테이지 파머스룸이었다. 정성껏 꾸며진 공간에서 샤인머스캣 미니케이크를 만들고 블루베리 묘목 분갈이 체험을 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 해봤는데 너무 즐거웠고 지금의 가족이나 미래의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익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중덕지자연생태공원으로 걸어가 연못을 가득 채운 연꽃을 구경했다. 하나하나 내 취향을 저격하는 일정이었다.

마음이 너른 분들과 함께한 덕에 왠지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수준급의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상오리 맥문동 솔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먼 곳에 있어 1시간 정도 이동했다. 무지렁이라 맥문동이 특정 동을 의미하는 지명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식물의 이름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공간을 보라색 꽃과 소나무가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이어 방문한 문경 쌍룡계곡은 생각보다 컸고 인파가 많아 놀라웠다. 평상을 빌려두셔서 거기서 쉬며 준비해 주신 과일을 먹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계곡에 발 담가 보고 혼자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큰 바위 위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로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고 아쉬움에 몇몇 분들과 밤마실을 나섰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정서적 친밀감을 높인 건 정말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어렵게 조금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쉽게 멀어지곤 했던 30대의 상처에 연고 같은 상황이었다. 무덤덤하게 넘기는 것과 상처를 받는 건 별개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밤의 북천을 지나 상주 시내까지 걸었다. 내를 사이에 두고 이토록 목가적인 풍경과 도시적인 풍경이 공존한다는 게 신기했다. 여러모로 오랜만에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다 잠들었다. 


3일차

첫날보다 익숙해진 잠자리에 푹 잤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곳에 모여 내려주신 맛있는 차에 어제 만든 케이크를 곁들여 티타임을 가졌다. 각자 꼽은 사진과 '8월 상주는 ??다'라는 주제로 후기를 나눴다. 나는 맥문동 사진을 뽑아 꽃말인 인내, 기쁨의 연속, 겸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단어로는 빙산의 일각을 적었다. 내가 겪은 상주,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의 면면은 그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분만으로도 너무 아름답고 값졌기에 미처 알지 못한 모든 빙산의 개별적인 여정이 고마웠다. 짧은 시간 동안 각자의 빙산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함께한 모두가 소중하고 감사했다. 

훈훈한 시간을 가지고 12시 넘어 다시 휴-사이드왕산으로 돌아왔다. 뭔가 수미상관형 일정이다. 마지막까지 식사를 챙겨주셨다. 샌드위치와 과일에 담긴 마음에 감동받았다. 점심을 먹으며 함께했던 분 중 작가님이 계셔 올라가서 읽어봐야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한 권 주셨다. 끝까지 상주는 너무 다정했다. 정말 좋았다는 말 외에는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오래전 자전거로 스쳐지났던 고장엔 미처 알아보지 못한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따뜻한 환대 덕에 포근한 사람들과 함께 대도시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누리며, 조금 늦춰야 오히려 닿을 수 있는 행복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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