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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Oct 17. 2021

겸허함을 일깨워준 가을 제주, 백록담

자연에게 받은 시혜로 깊어진 호혜에 대한 고민

새벽같이 일어나 한라산 등반을 위해 미리 준비한 아침을 먹었다. 예전에는 혼자 성판악 탐방로로 올라 관음사 탐방로로 내려왔는데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 관음사 탐방로로 왕복할 예정이다. 아직 기억에 선명한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인데 소소한 변곡점 덕에 같이 오르게 됐다...*

7시 50분 즈음 등반을 시작해 오른지 2시간 50분 만에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찾아 반가움도 들었지만 역시 한라산은 크고 높다. 각자 체력이 다르다 보니 혼자 오를 때완 달리 서로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

대피 같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했다. 지난번엔 겨울에 왔었는데 가을에 오니 확실히 푸릇푸릇하다. 계절마다 한라산의 경관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아름답다.


정상이 가까워지는 게 체감되지만 백록담은 나올 듯 나오지 않았다. 다리는 무거워져도 마음만은 점점 가벼워진다.

12시 30분 즈음 마침내 백록담에 도착했다. 운 좋게 이곳에 온 두 번 다 날이 맑았다. 이번엔 호수에 물도 꽤 있었다.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며 수많은 사람 속에서 맞는 바람이 참 시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 사진도 찍고 월드비전에서 진행하는 2021 글로벌 6K 하이킹 시즌2에도 참여했다. 등산 후 SNS 인증 미션에 참여하면 추가 기부가 되는 비대면 기부 프로그램이다. 정상석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게 미션이었는데 뒤늦게 가니 줄이 너무 길었다. 하산 시간인 2시가 임박해 못 찍겠다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기지로 멀찌감치서 도둑촬영(?)을 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사실상 떨어진 물에 걱정은 됐지만 바꿀 수 있는 게 없으니 기운 내어 내디뎠다. 마음과는 달리 벌써부터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릎은 시큰했지만 아름다운 자연이 힘을 줬다.

정상 언저리에는 등산객의 음식을 기대하는 까마귀 님들이 많이 계시다. 시혜가 아닌 호혜의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왠지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꾹 참고 내려와 삼각봉 대피소에 약 1시간 만에 도착했다. 내려오는 길에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그때 S펜이 빠졌다. 떨어뜨린 장소를 기억하고 뒤에 오던 친구한테 연락하니 마침 거기였고 다행히 유실물은 그대로 있었다. 잔디밭에서 바늘을 찾아낸 기적 덕에 감격스러운 재회를 할 수 있었다.

좀 쉬다 다시 힘을 내서 출발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길을 걸으며 '한라산은 거대하다'라는 명제를 몸소 느꼈다.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겸허함을 배운다.

6시 10분 즈음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정상에서 물이 거의 다 떨어진 뒤로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근처 편의점에서 물과 음료부터 사 달게 마셨다. 물은 생명이란 뜻의 'Maji ni uhai'라는 스와힐리어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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