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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Nov 07. 2021

군대 PTSD를 치유한 속초 북스테이 그리고 서점 여행

강원도 고성의 박격포병이 10년 만에 깨달은 속초의 상냥한 공간과 매력

군대에 다녀온 사람에게 보통 군 복무지는 왠지 모르게 꺼려지는 장소가 된다. 나는 강원도 고성에서 군 생활을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고성, 속초 지역은 제대 후 더 이상 관광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옆 부대 아저씨처럼 무채색 복무지로 남았다. 제대 후 가본 적은 있지만 이미 목적지가 정해진 일정에 참여했을 뿐 제 발로 찾은 적은 없었다. 어느새 거의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 정말 그곳의 강산이 변했을지, 다들 잘 지내는지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궁금했던 북스테이를 핑계 삼아 용기를 냈고 덕분에 오래전 손절했던 고장이 책을 매개로 다양한 매력이 가득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1.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 칠성조선소


칠성조선소는 이름 그대로 예전에 조선소였던 공간이다. 지금은 인스타그래머블한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바닷가 카페로 유명하지만 동화책 중심의 서점, 칠성조선소 북살롱도 잘 조성되어 있다. 배와 선원들로 북적였을 작은 선착장은 커피와 책을 만나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 자원이 됐다. 한 장소가 오래도록 쌓아온 헤리티지에 기반해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도시재생의 좋은 예시 중 하나였다. 문화공간을 표방하는 이곳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갈지 기대하며 역사의 한 찰나에 함께했다.



2. 속초의 터줏대감, 동아서점과 문우당서림


프랜차이즈 서점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지역마다 건재하는 향토서점을 볼 때면 반갑고 고맙다. 속초에는 두 터줏대감이 있다. 거의 붙어있다시피 가까이 있는 동아서점과 문우당서림이 그들인데 각자 조금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먼저 동아서점은 단층 구조의 너르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자연광이 넘실대는 따뜻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지역색이 묻어나는 독립출판물이나 소품들도 비치해 은은하게 바다 내음이 나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대표인 김영건 님이 썼던 대한민국 도슨트 속초 편을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던 터라 더 반가웠다. 

문우당서림은 2층 규모로 실내외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했다. 개인적으로 서점 내 전시된 다양한 문장들이 인상 깊었다. 인테리어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톤이라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조명도 상대적으로 자연광을 제한하고 적재적소로 여러 조명을 활용한 게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서점 내 전시된 다양한 문장들이 인상 깊었다. 훌륭한 두 서점을 연달아 볼 수 있어 황송했다. 



3. 독립서점에서 맞닿은 취향, 완벽한 날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지나치는 헌병을 보고 움츠러들던 언덕을 지나 집으로 오가던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다다르면 그 뒤에 독립서점 완벽한 날들이 위치해있다. PTSD를 느끼며 들어선 서점엔 따뜻한 고요가 가득했다. 시인 메리 올리버를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난 공간이 오래전 나의 서글픔마저 토닥여준다. 각기 다른 취향을 지닌 개인으로서 서로의 취향이 맞닿을 수 있는 독립서점은 낯선 도시의 오아시스 같다. 공간에 스민 책에 대한 애정이 소중하다.



4. 책으로 위로를 전하는 북스테이, 숲휴게소


개인적으로 여행에서 숙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 하지만 북스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과 함께하는 숙박을 뜻하는 북스테이를 표방하는 숙소가 조금씩 늘고 있다. 숲휴게소는 이름 그대로 숲 근처에 자리한 공간이다. 인상이 선한 주인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미 뜨뜻한 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다.

2, 3층에 자리한 방들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여행자를 맞아준다. 나는 월든이란 이름의 작은 다락방에 묵었는데 간소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호숫가라는 문장이 조용한 환대로 다가온다. 세심하게 꾸며진 공간이 주는 응원에 힘입어 평소보다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숙소 앞 양쪽으로 각기 다른 산책로도 있다. 왼쪽으로 가면 목가적인 풍경을 누릴 수 있는 논 산책로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청대산에서 삼림욕을 할 수 있는 숲길로 이어진다. 자연과 함께 걸음으로 영육을 충만하게 채웠다.




일반 순댓국을 먹던 박격포병은 2천 원 더 비싼 아바이 순댓국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 대가 중 일부로 많던 꿈과 패기를 어느 정도 세월에 지불했다. 모처럼 낯익은 곳들을 홀로 거닐며 트라우마와 향수를 함께 마주할 수 있었다. 이윽고 상냥한 곳곳을 알게 됐고 덕분에 책을 사랑하는 도시와 내가 지나온 길을 긍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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