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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Nov 17. 2019

2009 다름사랑과 만나다

20살 대학교 사회봉사단 입단 후 만나게 된 세상

2009년 20살이 된 다행히(?) 대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아직 봄꽃이 미처 다 피지 못한 3월, 나는 대학생활 첫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학교 신문사였고, 또 다른 하나는 학교의 사회봉사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책임한 행동이긴 했지만 둘 다 붙을지 몰랐던 둘 다 지원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당시 학교 사회봉사단이던 다름사랑이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붙고, 정말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숭대시보에 찾아가 상황을 설명드리고 사과를 드리고 봉사단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다른 선택지와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보다 나은 지금의 나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신입생 환영회를 시작으로 나의 봉사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연락이 거의 닿지 않지만 그리운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신입생 환영회

1년 동안 정말 다양한 봉사를 할 수 있었다. 먼저 지역 사회복지관과 연계하여 독거노인 어르신을 찾아뵐 기회도 있었다. 좁은 골목을 올라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할머니 댁에 찾아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봉사라고 말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버이날에 할머니 댁에서 윷놀이하는 모습



여름방학에는 강릉의 한 교육방과 연계하여 여름캠프를 열었다. 교육, 놀이,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가서 아이들과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중 한 친구와는 오래토록 관계를 이어갔는데, 입대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지금도 못내 미안하고 씁쓸하게 남은 순간이다. 그래도 나의 첫 대학 여름방학 또한 참 즐거웠던 시간으로 남았다.

강릉의 교육방과 연계했던 여름방학 캠피

2학기가 개강한 이후론 김장봉사를 진행했다. 이 봉사는 우리 학교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행사였다. 배추를 뽑는 것부터 양념장을 버무리고 박스에 담아내는 것까지 모두 우리 봉사단이 함께 했다. 물론 학교의 생활협동조합과 복지관, 봉사지원센터의 지원이 있었지만 모든 과정에 함께 했기에 봉사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몸은 참 고됬지만 이 시간도 정말 즐거웠다.

지역 위기가정을 위한 김장봉사



날이 차가워지고 이어진 봉사는 연탄봉사였다. 내 기억으론 학교 근처의 복지관과 한 기업이 연계하여 학생 봉사자들을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많이 재개발이 된 흑석동의 한 동네에서 하루 종일 연탄을 날랐다. 추운 날씨임에도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내가 기여한 바는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더 따뜻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길게 줄을 서서 연탄을 옮겼다
봉사를 마치고 함께 찍었던 단체사진


어느새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성탄절을 맞아 선물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는 봉사도 했었다. 그를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각 단원 별로 아이들을 학교로 인솔해와야 했다. 내가 맡은 아이는 이태원에 살았는데, 나는 이태원에 가본 적도 몇 번 없었지만, 뒷골목에 그런 동네가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한 친구를 동행한 뒤, 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타가 됐었다.

난 산타쓰. 20살인디?

그렇게 나의 2009년은 봉사단과 함께 정말로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때론 버겁기도 했지만  결국은 재밌고 즐거웠기에 점점 더 중독됐던 것 같다. 또 교회에선 발달장애 어린이들의 보조교사로 1년 동안 섬기며 아이들의 순수함과 부모님의 사랑에 나를 비춰 배우기도 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을 겪게 하고,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봉사로 이어지게 해줬던 그 모든 시간 덕에 스스로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은 들지만, 후회는 남지 않던 그런 스무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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