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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Nov 17. 2019

2009 동계 인도 해외봉사

잊지 못할 첫 출국, 첫 해외봉사

2009년 겨울 나는 학교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인도 단기해외 봉사에 다녀오게 됐다. 개인적으로 해외에 가본 적이 없었고, 해외봉사도 처음이었는데 마침 학교 인도해외봉사 1기였다. 결과적으로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했고 동시에 어느 나라에 가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정을 되짚어보면 학기 초쯤에 학교에서 공지가 했고, 학기 초중반쯤 서류 및 면접 등을 통해 선발이 완료되면 그때부터 팀별로 준비가 이루어졌다. 학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방학 때도 출국 전날까지 매일 맹연습을 했다. 당시  나는 3월에 입대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 팀의 철저한 막내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형들은 3,4살 차이가 났고 또 ROTC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군필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가 운 좋은 막내였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어떻게 버텼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게 긴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2월 초, 드디어 인도 콜카타로 향했다.

마침내 떠나는 공항! 파란 박스가 일명 '공용짐'이었다

정말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했던 콜카타. 우리는 또 산티니케탄까지 육로로 많은 시간을 이동해야 했지만 저렇게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들 덕에 처음부터 설렜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신기해했던 거 같다.

나마스떼?

먼 길을 돌아 도착한 우리의 숙소는 현지 선교사님의 댁이었다. 주로 식빵과 몇몇 과일로 아침을 해결했다. 

아침 식사

봉사와 별개로 참 많은 회의를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할 때 갈등은 늘 존재한다. 그 단순한 명제를 해외봉사를 통해서 배웠다. 덕분에 조금은 남을 이해하고 그 갈등을 조정해나가는 과정 또한 배울 수 있었는데 나는 그 과정 속에 당시 100분 토론 진행자 같다며 '손석희'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때론 무거웠던 회의 시간

그런 가운데 소소하게 생일을 챙겨준다든지 하는 이벤트로 더 가까워지기도 했다.

팀장님 충성충성

다시 봉사로 돌아오면, 우리가 주로 했던 봉사 중 하나는 노력 봉사였다. 지금은 어엿한 학교가 된 리빙워터스쿨에 첫삽을 뜨고 왔다.

저 3월에 입댄데...*

학교 근처 마을에서는 이렇게 준비해온 문화공연 및 교육봉사를 펼치기도 했다. 학교 사물놀이 동아리의 지도로 익힌 나의 장구 가락을 먼 땅에 전하고 왔다.

Drop the 가락!

그리고 차로 몇 시간 달려 다른 주에 거점을 두고 같은 봉사를 반복했다. 여기는 자르칸ㄷ드 주라고 우리고 원래 묵었던 웨스트벵갈 주의 산티니케탄과는 또 다른 곳이다. 김원준 씨의 쇼에 맞춰 응원무를 추고 베토벤 바이러스에 맞춰 태권무를 추기도 했다. 지금 보니 참 해외봉사 덕에 별걸 다해봤다.응원무에 사물놀이에 태권무까지...*

쇼 끝은 없는 거야~!
나 품띠다!

이때는 처음이라 그런지 솔직히 사진 욕심이 좀 있었던 거 같다. 내세우진 않았지만 누가 찍으려고 하면 빼지도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더 많은 걸 기억하고 남겨오는 거 같다. 사실 저 때는 내가 맡은 조만 교육에 필요한 재료가 부족해서 나도 아이들도 속상해하는 모습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밤이 되면 이렇게 다들 녹초가 됐다. 쟈르칸 주 숙소는 헛간 같은 곳에 짚을 깔고 초가지붕으로 된 곳이었다. 누우면 지붕 사이로 별이 보이고 화장실과 수도도 없었다. 나는 모든 해외봉사가 다 그런 곳에 묵는 줄 알았는데 다 그런 건 아니더라...* 그래도 처음이 낮춰준 기준이 두고두고 큰 자산이 됐다.

그렇게 약 열흘 간의 봉사 일정을 마쳤다.

자르칸드 주에서 우리를 묵게 해준 고마운 가족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되게 시원섭섭했던 순간...*

우리의 청춘 한 페이지...*

해외봉사의 장점 중 하나가 아마 이렇게 모든 봉사일정을 마친 뒤 주어지는 짧은 관광일정인 것 같다. 사실 관광 그 자체만으론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고된 봉사일정을 다 이겨내고 맛보는 그 성취감과 젊은 나이에 봉사로 겪을 수 있는 현지 경험은 참 값지다. 입대를 한 달 정도 남겨둔 나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고생 후에 낙이 온다

또 봉사 덕에 내가 쉽게 만나기 힘든 사람과 마음과 생각을 나누며 평생의 친구를 얻기도 한다. 우리를 도와줬던 란짓 선교사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엔 지금보다 영어도 짧았지만 현대자동차, 타타자동차, 산티니케탄의 타고르 등에 대한 얄팍한 지식으로 시작한 대화는 신과 인생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전기가 없어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얘기하던 자르칸드 주에서의 밤이 생생히 기억난다.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나누었고 정말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한 게 제대 후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복도를 걷다가 너무 닮은 사람이 있어 설마설마 하다가 '란짓?'하고 물으니 '수영?'이라 화답해 정말 반가웠었다.

좋은 친구 란짓!


그렇게 인도는 나에게 국내봉사와는 또 다른 해외봉사만의 특별한 '맛'을 알게 해준 고맙고 소중한 곳으로 간직되고 있다. 이때 인도에 가지 않았다면 입대 후의 수많은 불침번과 야간근무 때 떠올리며 되새김질할 추억 하나가 없었겠지...* 그러고 보니 군 생활을 견디는데 아이유와 소녀시대 못지않게 힘이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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