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팔가, 열린 무대
뉴 본드 스트리트에서는 사람들이 유리창을 본다.
몇 블록만 걸으면
사람들이 서로를 보는 광장이 나타난다.
레스터 스퀘어다.
레스터 광장(Leicester Square)
- 관객이 먼저 모인다
레스터 스퀘어에서 먼저 보이는 건
무대가 아니라 군중의 방향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반원을 만들고,
광장은 그 반원을 받아낼 만큼의
빈 공간을 남겨둔다.
열린 공간의 무대는 종종
지켜보는 몸의 뒤통수에서 시작된다.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아니다.
대신 해리포터 조형물과 포스터,
전광판이 ‘영화라는 분위기’만 남긴다.
한쪽에서는 누군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다른 쪽에서는 퍼포머를 둘러싼
반원이 완성된다.
이 광장은 공연장이라기보다
각자의 시간이 흘러가는
작은 무대들에 가깝다.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빛이 만드는 장면
피카딜리 서커스는 한 장면으로 요약된다.
중앙의 분수, 그리고 주변을 채우는 전광판.
겉으로는 기념물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크린의 장소에 더 가깝다.
사람은 풍경의 일부가 되고
도시의 중심은 화면 밝기와
업데이트 주기에 맞춰 움직인다.
그러나 이 화려함도 스스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분수 아래에서 몸을 숙여 일하는
형광색의 인물이 보이면
이 광장은 갑자기 ‘쇼’가 아니라
‘시설’로 보인다.
열린 무대에는 늘 관리가 붙는다.
개방은 선언이 아니라
반복되는 손동작으로 유지된다.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순간
군중은 사라지고 픽셀이 남는다.
피카딜리의 과밀함은
이렇게 공기로 풀어진다.
그 대비가 다음 광장으로 이어진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 무대가 완성되는 곳
건물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멀리 기둥 하나가 방향을 만든다.
피카딜리의 빛이 눈을 붙잡는다면
이곳의 기념물은 몸을 끌어당긴다.
넬슨 기념탑, 분수, 그리고 넓은 바닥.
사람들은 계단에 앉고
광장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무대가 된다.
여기서는 특별한 공연이 없어도
사람들이 장면을 만든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쉬고
누군가는 그저 앉아 도시를 바라본다.
빛이 시간을 잘게 나눈다면
기념물은 시간을 덩어리로 붙잡는다.
내셔날 갤러리(National Gallery)
- 무대 뒤의 문
광장의 가장 큰 배경은
내셔널 갤러리의 고전적인 파사드다.
이 건물은 단지 미술관이 아니라
광장의 장면을 완성하는 벽이 된다.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쉬고
어떤 이들은 안으로 들어간다.
광장의 무대는
그 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엔딩
트라팔가는 거대한 공연장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앉고
올려다보고
다시 걷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 광장은
누군가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관객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