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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Nov 22. 2020

생계형 알바, 생계형 작가?

 전업주부로 오랜 시간 살다가 아무리 혼자 몸이라도 스스로 가장이 돼서 꾸려나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세상은 내게 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자리를 구할 때는 항상 절박한 마음이 앞섰던 건 사실이고 대부분 나의 간절함은 면접에서 통했다.

 솔직함은 나의 무기였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 내가 이혼녀이고 내가 벌어야 생활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꼭 그렇게 까지 일자리를 구해야 되는 내 신세가 조금은 한탄스러웠다.

 

 할 줄 아는 게 집안 살림뿐인 내가 그나마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시간제 판매 알바였다.(원래 어릴 적부터 약골이었고 갱년기와 우울증을 두루 거치다 보니 내 체력은 바닥이었다.)

 물론 조카들 돌보는 일로 이혼 후  어느 정도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성장했고 내 손길이 필요 없을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프다고 마냥 동생네 울타리 안에서 갇혀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결심을 서두르게 되었다.

 내가 친숙한 집, 동생네(이혼 후 몇 년간 내가 오고 간 곳의 전부)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은 두려웠지만... 이 상태가 더 지속되면 그때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첫 발을 뗀 것은 어느 마트의 캐주얼 의류 코너다. 이곳은 다행히 내가 판매 경험이 없는데도 마음에 드는 눈치라 절박함을 어필하지 않아도 되었다...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주부로 아내로 엄마로 그 몫을 당당히 해내는 동료들을 보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스스로에 대한 각오도 커져갈 무렵-2년쯤 지난가을- 갑자기 찾아온 공황으로 다시 난 뒷걸음질 쳤다.

 그때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엄마는 항상 그렇듯 아무 말 없이 밥을 지어서 내게 안겼다...

  시간이 흐르고 긴 악몽에서 깨어난  나는 또 두려움을 누르고 세상으로 발을 떼었다.


 "언니는 어떤 목적으로 일을 하세요?"

 "여기 지원한 이유가 뭐예요?"

 내가 처음 보는 타입의 매니저이다. 마트의 판매 경험이 있기는 하나 백화점 경력이 처음인 내가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의류(매니저는 자기 일과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경력 있는 직원을 뽑으려다 전반적인 경기불황으로 매출이 저조한 탓에 알바를 구하고 있었다.)에 지원했으니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언니~노후자금 모으시려고 일하세요? 여기 알바로 일하시는 언니들은 여유자금 모으시려는 분, 아님 생계형 아니면 아이 다 키워놓고 남는 시간 일하고 그 돈으로 자기 필요한 거 사시는 분들 있으신데...

 제 경험상 생계형 언니들이 묵묵히 오래 버텨요~~"

  헐~~~

 그날 면접 나는 무사히 통과되었다.


 일은 고되었지만 백화점 안이 마냥 놀이터 같고 즐거웠다.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들을 질리도록 실컷 보는 것도 그렇고 마치 새장 속새가 푸른 창공을 날아가듯 자유로웠다. 의욕도, 절박함도 잘 균형을 맞춰갔다.

 차츰 아픈 마음이 회복될 무렵 엄마가 골절로(엄마는 골다공증이 심해 재채기만 잘못하셔도 골절이 생긴다. 더욱이 여든여섯의 고령이심) 병원에 입원하게 되셨다.

  작년 가을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셨던 엄마는 얼마 전 요양병원에서 요양원으로 옮기셨다. 혼자 남겨진 그해 가을  며칠을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울었다. 그래도 일은 악착같이 매달렸다. 손을 놓으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것 같았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은 가슴 한쪽에 밀어놓았다.

 몇 번씩  가슴이 울렁거릴 때가 있었지만 대견하게도 잘 버텼다. 나의 내면은 점차 단단해져 갔다.


 올해 초 찾아온 코로나 19는 그전ㆍ후의 세계가 달라질 만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불황은 깊어졌고 대면으로 영업하는 우리 매장도 타격이 컸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도 풀 죽은 매니저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매장은 혼자서도 운영이 가능할 정도로 고객 수가 급감했고 그렇게 버티기를 반년쯤  하다 일을 그만두었다. 8월 말의 이야기이다.

 생계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전처럼 좌절하거나 동굴 속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다시 구인활동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경기는 안 좋았고 백수생활이 3달을 넘어섰다. 그 기간 나는 예전의 무기력한 나로 돌아갈까 봐 직장 생활할 때의 생활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면서 매일 친구의 카페에 가서 글을 썼다.

 가을 나들이길에서 지인이자 페이스북 친구인 그녀가 내게 글을 쓸 것을 권했다. 페북에 올린 내 글에서 힘이 느껴진다 하셨다.

 오래전 잊고 지내던 꿈 하나가 불쑥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학창 시절 은사님이 하시던 말씀도 떠오른다.

"은경아, 무언이든지 포기하지 않고 10년 이상을 갈고닦으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 되는 거야~너의 재능이 오래가길 바란다~"하시며 환하게 웃어 주시던 모습...

 사는 것이 버거워  그 꿈조차 사치라 여겼셨는데, 긴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만났다.


 먹고사는 것은 쉬운 일이 없다. 백만 원을 벌려면 백의 가치만큼 힘들고 더 많은 돈을 벌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알바 경력 얼마 안 되었지만... 인생에서 꿀알바는 없다.ㅎ

 여성인력개발센터서  교육을 받고 오늘 테스트까지 마쳤다. 오래된 꿈을 이루기 위해선 당분간은 알바인생이 지속되지 않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대가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비록 미미하지만 난 첫 발을 떼었으니 반은 성공했다.

 

 여전히 구직활동 중이다. 가슴속에서 막 튀어나온 꿈은 아직은 돈벌이가 되기엔 멀었다. 그러나 인생 뭐 있나?? 꿈꾸는 자는 아름답다 하지 않았나~~

 글을 쓰고 그 글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사는 것은 나의 꿈이다. 좋아하는 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 오늘도 고단한 하루였다. 계절은 겨울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하기엔 내 심장이 너무 뜨거워졌다.


  "난 솔직함과 절박함이 무기인 생계형 작가를 꿈꾸는 생계형 알바입니다~~~"

 구질구질하면 좀 어때? 사실이고 진심이니깐...

아침부터 내내 씨름하던 글이 안 풀려 고심 끝에 삭제~~~~

다시 써 내려간다. 어쩌면 이번에도 다 마치지 못하고 휴지통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낼 다시 쓰면 되지~~~~

비로소 오랫동안 웅크린 자아가 기지개를 켠다.

 계속 정진하라는 은사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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