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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Mar 04. 2021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와 3월 새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봄기운이 느껴지는 나른한 봄날 오후이다. 집에만 있기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책을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오랜만에 바깥공기가 상쾌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히 걷기 좋은 날씨가 좋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도 푸르고 맑다. 이제 비로소 겨울의 긴 터널을 통과해 눈부신 봄의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보통은 산책을 나가면 가볍게 30분쯤 집 주변을 돌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늘은 맑고 푸른 날씨가 너무 좋아 걷다 힘이 들면 벤치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또 걷다 힘이 들면 명희 씨 카페에 잠시 쉬었다 또 걷고... 하루의 반나절을 집 근처에서 보냈다.

 몇 주째 이유 없이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쳐있었는데 모처럼 느끼는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이라 밖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불빛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말문이 닫혀버렸다. 좋아하는 글조차 쓸 수 없이 온몸의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온몸이 바닥에 붙어 혼연일체가 된 느낌. 일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자도 자도 계속 피로는 몰려왔고 사정없이 쏟아지는 잠에 나는 번번이 굴복했고 그럴 때마다 나의 무기력함에 화가 났다.

 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혼돈이 불안했고 초조했다. 의식의 날을 세워 애써 앞으로 전진하려 하면 할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이럴까... '하고 하루하루 매시간을 고민해봐도 나의 바닥을 알 수 없는 영혼과 육체의 추락은 끝이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암울한 삼, 사십 대를 보낸 내게 최근의 1,2년은 가장 마음이 여유롭고 평온한 시간이었는데... 이 평안한 고요가 무너지고 예전의  허깨비 같은 내 모습으로 돌아갈 것 같아 지레 겁이 났다.

 자꾸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왜 예전의 아팠던 기억이 불쑥 올라오는지... 지금 현재를 잊고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를 내다보니 어느새 삶의 희망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에서 제일 마음이 평안한 최근은 '하루씩만 견뎌내자.' 하며 현재에 내 두 발을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을 때이다. 현재, 오늘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는 과거의 상처도 후회도 스스로에 대한 연민도 잊을 수 있고 아무 준비 안된 자의 다가 올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도 나의 몫이 아니었다. 불안과 염려를 뺀 나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건 현재뿐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니 기쁨이 보이고 오히려 삶의 의욕이 생겼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고 내 존재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희망이란 놈도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몇 주 전인지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 쓰고 싶은 글은 매일매일이 진부하고 제자리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내 속을 태우는... 그리고 현실의 삶에서도 6개월 이상 제대로 된 직장을 못 찾고 있는 실업상태는 자연스레 우울한 미래를 떠올리게 했고 삶의 정체 구간, 슬럼프 상태로 빠져들게 했다.

 몇 년 후면 노년기로 접어드는 나이, 작가가 되고 싶지만 재능조차 불확실하고, 건강도 돈도 부족한 내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니 갑자기 몸에 힘이 빠졌다.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정신은 균형을 잃고 흔들렸으며 몸은 시들어갔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삶의 모든 문제의 해법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조언과 기도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절대적 고독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나도 처음엔  평안을 깨고 들어 오는 현실의 문제와 위협에 회피와 부인으로 맞섰다.

 그와 비슷한 시기 우연하게도 몸이 시름시름 아펐다. 어렵사리 완성한 에세이 두 편을 삭제하고 그리고 그냥 틈만 나면 잠만 잤다. 그러다 며칠 전 봄비 오는 소리에 놀라 창밖을 보았다. 새벽어둠은 짙게 깔렸고 세찬 굵은 빗줄기는 겨우내 묵은 먼지들을 씻어 내고 있었다.

 내가 과거와 미래에 눌려 있는 동안에도 어느새 계절은 흘러 봄의 문턱으로 접어들었다. 내가 무수히 많은 날들을 시름에 잠겨 헤맬 때도 자연은 순환의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 변함없는 생명의 약속이 그 비 오는 새벽에 내게 말을 건넨다. 미래도  곧 다가올 현재라고-너의 희망도 기다리는 너에겐 언젠가는 현재가 될 것이라고... 빗소리 사이사이 봄의 정령이 나를 토닥이며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는 겨울의 남은 끝자락까지 씻어내었다. 비가 그친 며칠은 우리가 사는 대기에 새로운 필터를 끼워 놓은 듯 우리 주위의 봄빛이 다르다. 왠지 슬럼프가 오래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집순이도 밖으로 돌게 만든다는 봄바람~~ 나는 봄이 가장 좋다. 동토를 뚫고 나오는 강인한 생명력도 좋고  따스한 봄볕도, 봄내음도 좋다.

 오늘 늦게 잠이 들어 3,4시간밖에 잠은 못 잤지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반해 자리를 털고 나갔다. 실내에서 보는 것과 직접 봄햇살 아래 서서 걸으니 나의 걱정들이, 나의 아픔이 엄살 같아 부끄러워진다. 자연이 나한테는 치료자이자 스승이었다. 그것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만끽할 수 있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피곤함보다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 우울할 때도 슬플 때도 암담할 때도 있지. 그렇다고 그 모든 감정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야. 그것도 너의 일부분일 뿐이야. 스스로를 쉽게 단정 짓지도 단죄하지도 않기.'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 번을 되뇌었다.


 허기진 저녁시간이다. 따뜻한 순두부찌개에 나물 몇 가지 소박한 찬에 달게 밥을 먹고 일찍 잠에 들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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